1955년 가을 미 상원외교위원회에서 중국사태에 관한 청문회가 열렸을때다. 상원의원들은 델레스 국무장관에게 『장개석총통은 걸핏하면 무력으로 본토를 수복하겠다고 말하는데 구경만 하고 있을 것인가』고 추궁했다. ◆의원들이 「본토수복계획」에 관심을 갖는 것은 자칫 거대한 중공을 자극시켜 혹시 3차대전이 유발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이에대해 덜레스장관은 『그렇지않아도 장총통에게 진의를 묻자 그는 「나도 대륙 반공이나 정권을 다시 잡으리라고는 생각 않는다. 다만 군의 토기진작을 위해서는 이같은 강경선언을 하지않을 수 없다」고 고백하더라』고 전했다. ◆1950년∼60년대 기간동안 공산주의를 유난히 미워한 나라는 분단된 한국 자유중국 월남 서독 등이며 그 중에서도 한국과 자유중국은 손꼽히는 반공국가 였다. 두나라 모두 공산당의 침략으로 엄청난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입는 등 어는 누구보다 그들의 침략성과 음해성을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한ㆍ중양국은 공산당을 철저하게 혐오했던 이승만ㆍ장개석이라는 지도자의 영향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반공원칙을 설정했다. 한국은 반공 멸공 승공 등의 기치를,자유중국은 삼불정책(공산당과 불협상 불접촉 불담판)을 기조로 삼았다. 즉 반공에 관한한 난형난제로서 74년 한국이 7ㆍ4공동성명에 의해 남북대화를 시작하자 자유중국은 『끝내 북한한테 속고 말것』이라고 충고를 하기까지 했었다. ◆이처럼 공산당과 영원히 대면을 하지않을 것으로 여겼던 자유중국은 87년 11월 국민들의 본토방문 허용을 스타트로 중국과 적극교류 공세를 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본토에 거액의 자본투자,직교역,직통전화개통,민간대표부등을 제의한데 이어 최근 이등휘총통은 3불정액의 포기를 선언했다. 물론 대만에 대한 고립화와 무력사용포기,중국의 민주화추진 등의 전제조건을 달았으나 사실상 적대정책을 거두고 본격교류ㆍ통일촉진을 시사한 것. 7ㆍ4공동성명후 근 20여년이 지나도록 남북한 관계가 정체되고 있는 우리로서는 커다란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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