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사과문제등 한일간의 현안이 아직 명쾌히 해결되지는 않았으나 노태우대통령의 방일은 예정대로 오는 24일 이루어질 것으로 알려졌다.해방후 45년동안 한일관계는 이번 일왕사과문제나 재일동포 3세문제에서 보듯 일제 36년과 관련된 양국의 감정이 개입,숱한 풍파를 겪어왔다. 일본 고위인사의 망언과 교과서 왜곡파동등 각종 사건은 한국민들의 감정을 극도로 자극해 양국관계를 껄끄럽게 만들었으며 이러한 양국간 대립과 갈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앙금인 것이다.
그러나 한일양국은 지리적인 특성이나 문화적 유사성등으로 인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특히 최근 들어서는 경제적 상호의존도를 높여가고 있는 실정이다.
노대통령 방일을 계기로 지난 45년 광복이후 지속되어온 애증의 양국관계를 연대별로 살펴본다.
◎동란와중 회담시작… “일통치 유익” 구보다 망언 50년대/“굴욕외교” 비난속 6ㆍ3사태겪으며 국교정상화 60년대/김대중씨 납치문세광사건 이어져 극도로 냉각 70년대/84년에 국가원수 첫 방일
○50년대
대한민국정부수립후 10년동안 한일 양국의 관계는 명분과 감정이 앞선 냉각기였다.
일제강점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우리사회에는 배일감정이 팽배해 있었고,자유당정부도 이러한 국민감정을 보다 중시했다.
이승만대통령이 52년 1월 해안선으로부터 60마일지점에 평화선을 획정,이 선을 넘는 일본어선을 나포토록 한 것도 자신이 철저한 배일주의자인 탓도 있지만 당시의 국민감정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측은 완강한 대일자세속에서도 52년 2월 일본요시다ㆍ시게루정부와 제1차 회담을 시작해 50년대에 4차례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들은 평화선문제,일본측의 망언ㆍ재일교포북송 등으로 타결점을 찾지 못했다.
평화선문제와 재일교포강제퇴거문제등으로 결렬된 2차회담(53년 4월)에 이어 같은 해 10월에 열린 3차회담은 일측대표인 구보타의 「일본의 36년간 한국통치는 한국인에게 유익했다」는 망언으로 중단됐다.
이후 오랫동안 냉각상태에 있던 양국은 58년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어부석방,일본오무라(대촌)수용소에 수용됐던 한국인의 교화석방으로 해빙무드를 조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59년 2월 일본정부가 한국의 결사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일동포의 북송을 승인함으로써 또 한차례의 곡절을 겪게돼 그해 8월의 4차회담도 양측의 엇갈린 주장속에 끝나고 말았다.
○60년대
3ㆍ15부정선거로 자유당정부가 휘청거리던 60년 3월 후지야마(등산) 일본외무장관이 서울에 일대표부설치를 희망하면서 중단됐던 막후교류가 재개되기 시작했다. 이어 이대통령 하야직후인 그해 5월 허정대통령권한대행은 『재일동포의 북송정지가 회담재개의 절대조건은 아니다』라는 성명을 내어 주목을 끌었다.
민주당정부가 들어선 뒤 일측은 고사카(소판) 외무장관을 친선사절로 파견,우호제스처를 보냈고 장면내각은 고사카와 회담재개에 합의,60년 11월 5차회담을 열고 평화선등에 대해 일부합의를 이루었다.
60년대 한일관계의 최대이벤트는 65년의 한일국교정상화. 민주당의 한일관계 개선노력을 토대로 5ㆍ16주체세력의 핵심인 김종필 당시중앙정보부장은 62년 2월20일 일본을 방문,현해탄을 좁히는 막후교섭을 시작했다. 김부장은 그해 9월 오히라(대평)외무장관과 한일기본조약의 골격이라 할 수 있는 소위 「김ㆍ오히라메모」에 합의했다. 이 메모의 내용은 지금도 정확히 공개되지 않고 있으나 대일청구권(일본의 한국지배로 발생한 피해에 대한 보상)과 관련한 내용이었다.
같은 해 12월26일 일본정부가 김ㆍ오히라 합의를 승인한다고 우리측에 통보함으로써 양국은 국교정상화를 향한 속보를 시작,64년 2월 제6차 예비절충에서 실무작업을 대강 마무리했으며 우리 정부는 공화당의장으로 변신한 김종필씨를 다시 파일,마무리 정치결충을 벌이도록 했다.
그러나 청구권문제ㆍ어업협상ㆍ문화재반환등에서 우리측이 「굴욕외교」를 폈다는 여론이 일면서 한일회담반대시위가 연이어 발생,급기야 「6ㆍ3사태」를 초래하기까지 했다.
그후 65년에 들어와 양국은 이동원외무장관의 방일(1월)및 시나(추명)외무장관의 방한으로 기본골격을 만든 뒤 그해 6월22일 한일기본조약을 체결,가깝고도 먼 「동반자시대」를 공식으로 열었다.
○70년대
국교정상화 이후 양국은 착실히 우호ㆍ협력관계를 다져갔으나 우여곡절도 많이 겪었다. 71년 7월 사토(좌등)일본수상이 박정희대통령취임식에 참석차 방한한 이후 이듬해인 72년 박대통령은 일왕의 초청으로 일본을 공식 방문키로 일본측과 합의했었다.
양국정부는 72년 10월6일 박대통령이 같은해 11월13일 일본을 방문한다고 공표했으나 발표 11일만인 10월17일 「10월유신」을 일으킨 우리측이 국내사정을 이유로 방일을 취소했다.
이후 양국은 73년 8월8일 「김대중씨 납치사건」으로 껄끄러운 관계를 맞았으며 다음해인 74년 8월15일 문세광사건으로 최악의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8ㆍ15경축식장에서 발생한 박대통령저격사건에 대한 일본측의 무성의한 수사및 관리들의 자극성발언등으로 촉발된 학생ㆍ사회단체들의 일본성토시위는 20여일이나 계속됐으며 마침내 시위대가 주한일본대사관에 난입하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당시 일본 공안당국이 문세광의 공범 미키코를 기소하루만에 풀어주고 마쓰나가 일본외무성조약국장이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가 아니다』라고 발언한 사실이 국내에 보도되자 시민들은 흥분을 억제하지 못한 채 일본대사관에 들어가 옥상의 일본기를 끌어내리는등 최악의 상황을 연출했다.
문세광사건으로 한일관계는 상당기간 냉각되었으나 70년대중반을 넘어서며 경제교역등을 통해 실질적인 우호관계는 계속 증진됐다. 특히 수출드라이브정책을 강력히 추진해온 우리측은 일본으로부터 상당량의 원자재와 자본재,기술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같은 경제협력증진에 따라 무역역조가 늘어나고 우리경제의 대일의존도가 심회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80년대
80년대의 한일관계는 일본의 교과서 왜곡사건으로 초반부터 시끄럽게 출발했다. 일본은 82년 6월 끝낸 교과서검정과정에서 일본이 저지른 한반도침략사를 모두 삭제하는 대신 침략을 진출로 고치고 36년간의 식민지무단통치를 외세로부터의 보호로 미화하는등 역사를 왜곡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정부는 일본측에 진상규명을 요청하는등 강력한 외교적인 대응책을 폈다. 전국을 일본에 대한 비난여론으로 들끓게 한 교과서왜곡사건은 당시 일본문부성과 국토청장관등의 『한국교과서에도 오류가 있다』『교과서검정은 내정문제』라는 등의 망언파동으로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했었다.
이때의 교과서 왜곡사건은 한국뿐 아니라 중국등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쳐 국제적인 외교문제로 비화됐다.
결국 교과서파동은 일본정부의 시정약속으로 일단락되었으나 일본의 대한시각이 변하지 않았음을 일깨워주는 교훈을 남겼다.
그러나 한일 양국은 교과서파동직후인 83년 1월 일본수상으로선 처음으로 나카소네ㆍ야스히로(중증근강홍)수상이 한국을 공식방문함에 따라 다시 우호ㆍ협력의 전기를 모색했다. 당시 일본으로부터 40억달러의 경협약속을 받은 우리측은 다음해인 84년 8월 전두환 전대통령이 우리나라 국가원수로선 처음으로 일본을 공식방문함으로써 일본과 본격적인 동반자관계를 맺게 됐다.
그 이후 한일은 86년 후지오(등미정행) 일본문부상의 『한일합병에는 나름대로의 역사적 배경이 있다. 한국측에도 얼마간의 책임이 있다』라는 내용의 망언으로 인해 또 한차례 외교분쟁을 겪었으나 대체로 순조로운 관계를 유지해왔다.
89년 현재 왕복 2백만명의 인적교류,총3백억달러의 교역량을 보이고있는 한일양국은 이제 뗄래야 뗄수 없는 상호의존적인 관계로 발전한 것이다. 90년대를 여는 현시점에서 양국은 21세기의 협력관계를 다지기위해 진정한 의미의 과거사청산이라는 금세기 마지막 과제를 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정광철ㆍ이영성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