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차례 단식투쟁… “정신착란”호도/체중 17㎏줄자 강제 급식실시/방대한 연구기록ㆍ일기강탈… 기억더듬어 재집필/“부도덕한 유태인 창녀인 아내가 사주”흑색선전오랜 여행끝에 나와 아내 루시아는 가가린가에 있는 12층아파트의 1층을 배정받았다. 큰 방에 들어서자 한사람이 책상뒤에 앉아있었다.
『난 고리키지역 검찰차장 페레리긴이요. 규칙을 말해 주겠소. 시계를 벗어나는 것은 금지돼 있소. 당신은 감시를 받을 것이며 외국인이나 범법자들을 접촉해서도 안되오. 내무부에서 언제 당신이 신고해야할 지 추후 통고해줄거요. 건의사항이 있으면 KGB를 부르시오』
아직 여행허가가 있었던 루시아는 5일후 모스크바로 떠났다. 그녀는 다음날 기자회견을 열고 유배생활과 아프간사태 등에 관한 견해를 담은 나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동안 몇명의 고리키주민들이 나를 찾아왔다. 그들중에서 「반국가행위죄」로 5년간 강제노동수용소 생활을 한 세르게이ㆍ포노마레프와는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방문객들은 방을 나서자마자 근처에 있는 「공공질서유지를 위한 파출소」로 끌려갔다. 그들은 여기서 수시간동안 감금당한 채 신분확인을 받는등 온갖 수모를 겪었다.
몇주후에는 관의 허가를 받은 사람만이 출입이 허용되더니 그나마 방문객들도 딱 끊어졌다.
1월28일 내무부본부에 출두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추프로프소령과 슈바로프대위라고 신분을 밝힌 KGB요원들은 내가 모스크바에 전화하고 헬싱키협약안에 추인한 것에 불만을 터뜨렸다.
KGB는 또 내 서류철을 노리고 있었다. 어느날 치과에 들러 치료받는동안 연구기록과 그동안의 일기와 이 회고록의 원고 등을 넣어둔 가방을 잃어버렸다.
나는 기억을 되살려 이를 재집필해 루시아편에 모스크바로 보냈다.
이들 기록은 미국에 있는 에프렘과 탄야에게 보내졌는데 상세한 내막은 아직 밝힐 수 없다. 마침내 82년 4월 타이프용지로 총 1천4백장 분량의 원고를 탈고했으나 그해 10월 또다시 도난당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약물」까지 써 차유리를 깨고 탈취하는 강도같은 수법이었다.
10월21일 『나는 11월22일부터 단식투쟁에 들어가겠다』는 전문을 브레즈네프와 소 과학원원장에게 발송했다. 알렉세이의 약혼녀 리자의 미국행을 거부한 당국의 처사가 직접적인 계기가 됐지만 넓은 의미에서 유배에 대한 항의와 인권과 거주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연장이었다.
반체제인사 블라디미르ㆍ부고프스키의 처우개선을 요구했던 74년의 단식투쟁은 많은 격려를 받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명분이 약하다는 비난이 따랐다. 나에게는 이번이 보다 절실했으며 내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생존을 건 투쟁이었다.
단식투쟁 13일째인 12월4일 정원에서 루시아와 산책하고 있는데 낯익은 KGB요원이 찾아왔다.
집안에 들어가보니 하얀코트차림의 여덟사람이 이미 방안에 앉아있었다. 『우리를 죽이러 왔나봐요』 아내가 속삭였다.
불청객 가운데 하나가 보건성에서 나왔다며 신분을 밝혔다. 『병원에 입원시켜야겠습니다. 당신의 자식들을 포함한 많은 시민들로부터 수많은 편지를 받고 있습니다』
저항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우리는 순순히 따랐다. 우리는 서로 다른 앰뷸런스에 떠밀려져 나는 세마슈코병원에,루시아는 다른 병원에 이송됐다.
병원에서 나는 치료를 거부했다. 루시아와 떨어져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더 큰 고통이었다.
KGB의 의도는 명백했다. 「사하로프를 치료해 준다」고 떠들어 전세계에 있는 우리친구들을 무마시키려한 것이다.
의료진이 하루 두세차례씩 무언가 체크를 했다. 이중에는 정신과의사도 끼어있어 의심이 갔다. 그 정신과의사는 내 신경기관의 기능이 저하되고 있으며 혼돈된 정신상태라고 진단했다.
12월8일 담당의인 루레프박사가 말했다. 『이제 단식투쟁을 끝내야 합니다. 재고할 수 있는 시간도 불과 몇시간밖에 안남았습니다』
의사로서의 마지막 조언인 셈이었다. 같은 시간 다른병원에 있던 루시아도 단식을 하면서 강제급식을 하면 죽을때까지 투쟁하겠다고 버텼다.
우리의 단식투쟁은 17일만에 끝났다. 마침내 당국도 우리의 요구에 굴복,리자는 미국에 있는 알렉세이곁에 갈 수 있게 됐다.
83년 여름 당시 최고지도자였던 유리ㆍ안드로포프는 나의 근황을 묻는 미국상원의원단에게 내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라고 밝혔다. 우리를 감옥에 처넣을 수도 없고 국외로 추방하기도 곤란했던 KGB의 새전략이 아니었던가 싶다. KGB는 또 「부도덕한 유태인 창녀」인 루시아가 나를 사주한다는 흑색소문을 퍼뜨려 나의 투쟁을 왜곡시키려고 애섰다.
84년 5월 루시아가 고리키공항에서 체포돼 외부세계와의 유일한 연결고리였던 그녀의 모스크바방문이 끊기고 말았다.
그녀는 재판을 거쳐 8월에 「소련체제를 비방」한 죄로 5년간의 고리키유배를 언도받았다.
나는 극도로 허약해진 그녀의 치료와 해외친지 방문을 위한 그녀의 외국여행을 요구하며 85년 4월 고리키에서 두번째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또다시 세마슈코병원에 수용된 나에게 이번에는 강제급식이 행해졌다. 8월13일에 이르러 평상시 79㎏ 이상을 유지하던 내 체중은 62㎏으로 뚝 떨어졌다. 병원측은 이날부터 비상수단으로 양쪽 허벅지에 주사를 꽂아 영양을 주입했다. 한번에 수시간이 걸리는 이 피하주사를 맞고나면 두다리가 부어올라 하루 이틀은 걸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