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총리 의회서 “정치이용반대” 또 밝혀/「겉은 양보ㆍ속은 요지부동」여전/잇단 대안도 진실 안담겨 의문/일 정부 무성의엔 자국내 일부지식층도 비난높아【동경=정훈특파원】 아키히토(명인)일왕의 사죄발언문제를 둘러싸고 한일양국간에 외교전으로까지 비화조짐을 보였던 치열한 공방은 결국 『2개의 얼굴을 가진 일본』을 다시한번 확인시켜준 채 용두사미로 마무리될 전망이다. 말끝마다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 한국」이라고 내세우면서도 속으로는 「가장 먼나라」로 치부해 버리는 일본의 이중성이 이번에도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한국정부는 노태우대통령의 방일이 확정되면서부터 아키히토로부터 명확한 사죄발언을 받아낸다는 전제아래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는등 일본정부에 대해 유형ㆍ무형의 압력을 가했으나 일본은 요지부동,어느 면에선 우리 정부의 체면만 말이 아니게 돼버린 셈이다.
우리 정부는 대통령의 방일에 앞서 오는 22일 박태준민자당최고위원겸 한일 의원연맹 한국측 회장을 일본에 파견,일본정부의 보다 성의있는 자세를 촉구할 방침이다. 그러나 아키히토에 관한 일본정부와 의회,그리고 언론등도 일체가 돼 조금도 물러설 기미가 없어 보인다.
일본의 이같은 자세는 17일 가이후(해부)총리의 중의원예산위원회 발언에서도 거듭 확인됐다. 가이후총리는 사회당의 야마하나ㆍ사다오(산화정부)의원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국왕의 발언은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한국측의 요구에 전혀 양보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했다. 이에따라 이 문제를 처음부터 거론,국민의 기대를 모으게 했던 우리 정부의 입장만 어렵게 됐다.
사실 일왕의 사죄발언문제는 어제 오늘에 제기된 문제가 아니다. 해방후 끊임없이 되풀이되어온 현안으로 우리 정부로서는 「과거의 청산」으로 요구해온 터였다.
이 문제가 피크에 올랐던 것은 지난 84년 9월 전두환 전대통령 방일때였다. 이때 히로히토(유인) 전왕은 궁중만찬회 석상에서 『양국간에 불행한 과거에 대해 진심으로 유감』이라고 얼버무렸는데 당시 우리 정부는 이를 사죄발언으로 받아들였었다.
문제는 양국간의 시각차. 일본정부는 이를 사죄발언이 아니고 국왕의 단순한 「발언」,즉 인사말정도로 해석했다. 지금 두 나라간의 공방전도 어휘에 대한 해석통일이 안돼있는 데서 발단이 됐다고 할 수 있다.
우리측은 일관되게 「사죄발언」을 요구한 데 대해 일본은 그냥 「발언」 내지 존칭을 붙여 「말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같은 어휘상의 차이외에 일본은 한국에 대한 사죄는 지난 84년에 이미 끝났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요미우리(독매)신문은 지난 16일자 사설에서 이 문제를 거론,한국의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 이 신문은 『히로히토국왕에 이어 당시 총리였던 나카소네(중증근)의 진사를 한국의 매스컴들도 대체로 「사죄」로 받아들였다』고 강조하고 있는데 일부 일본언론들도 동조하고 있다.
여기에 한술 더 떠 자민당의 오자와(소택)간사장은 『땅에 무릎을 끓고 설설 기라는 얘기냐』는 자신에 망언에 대해 이원경주일대사에게 사과는 했지만 대부분의 자민당의원들은 한국에 대한 사죄는 더이상 필요없다는 분위기이다.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자민당 와타나베(도변)파의 한 간부는 『오자와 간사장의 발언은 국민의 소리를 대변한 것』이라고 두둔하고 『한국대통령이 올 때마다 이렇게 한다면 끝이 없을 것』이라고 오히려 한수 더 뜨고 있다.
특히 구차스럽게 헌법조항까지 끌어대가며 사죄발언불가의 방침을 내세우면서 여기에 생색이라도 내는 것처럼 「유감」 대신에 「가슴아프게 생각한다」고 양보처럼 보이는 대안을 내세우는 일본정부의 대처는 대통령방일의 의미를 축소시키려는 의도로 엿보이고 있다.
대통령 방일을 불과 1주일 앞둔 상황에서 양국간에 이같은 티격태격이 아직도 빚어지고 있다는 것은 의전상의 전례에 비추어볼 때도 큰 문제이다.
일본의 이같은 자세는 예견돼 왔다는 점에서 대통령 방일의 성과자체도 의문시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양식있는 학자들이나 국민들사이에서는 일본정부의 무성의한 대한자세를 비판하는 소리도 높다. 혜천여학원대 의우쓰미(내해애자)교수는 『일본에는 아직도 원폭피폭자문제,일본군에 강제징용된 사람들에 대한 보상등 여러가지 책임이 미해결인 채 남겨져 있다』고 지적,『진심으로 사죄를 해야될 것』이라고 일본정부의 성의있는 대처를 촉구하고 있다. 또 한 시민은 『지금의 아키히토국왕은 전쟁을 일으켰던 히로히토 전왕의 장남으로서 왕실의 계속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전제,『헌법상 제약이 있다면 인간으로서 한국에 사죄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아사히(조일)신문은 현재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한일양국간의 관계를 타개하기 위해 일본정부와 의회가 식민지배의 역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확한 반성과 사죄를 하고,국왕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상징국왕」에 알맞는 표현을 하는 방법을 제시,주목을 끌고 있다. 이 신문은 17일자 사설에서 「국권의 최고기관」인 의회가 당연히 사죄의 뜻을 초당적으로 결의한 후 국왕이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수순이라고 지적하고 있는데,어떻든 일본은 한국에 있어서 「먼이웃」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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