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유럽질서 태동… 불 지위 약화/「독자노선」 골리즘 수정 불가피【파리=김영환특파원】 지금 프랑스에서는 드골에 대한 추모와 재평가작업이 한창이다. 프랑스국민과 언론들은 2차대전이후 최대의 격동에 휘말린 유럽이 새 질서를 추구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드골이라면 과연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했을까」하는 논의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 논의는 금년이 드골탄생 1백주년 및 작고 20주년,나치독일의 프랑스점령후 그가 영국에서 「자유프랑스」 수반으로 프랑스국민에게 라디오방송을 통해 구국을 호소한지 50년이 되는 해여서 의미가 각별하다.
드골의 족적은 프랑스의 독자적인 안보방위와 외교정책에서 두드러진다. 그는 냉전의 격동기(58∼69년)에 프랑스를 이끌면서 미ㆍ소와는 다른 제3의 길을 모색했다.
프랑스는 몇안되는 핵무기 보유국가로서 독일이 분단되고 영국이 EC에서 배제된 유럽(영국은 70년가입)에서 정치적인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드골의 방위전략은 프랑스는 그 자신의 국익을 위해 군사적으로 어떤 다른 동맹국에서도 독립되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안보면에서의 독립성은 프랑스의 영광을 찾는 골리즘(드골주의) 외교에도 그대로 나타나 전통적으로 대통령은 파당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고유의 외교정책을 전개할 수 있도록 했으며,외교정책에의 도전은 비애국적인 것으로까지 간주했다.
이러한 국방과 외교에 대한 국민적 컨센서스는 2차대전중의 국가붕괴와 전후식민지상실 등으로 정치사회적 충격에 빠져있던 프랑스가 자신감과 통일성을 회복하는데 기여했다.
프랑스에서 영국이나 독일과는 달리 반핵운동이 없는 것도 이러한 컨센서스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골리즘은 20여년이 지나 지축을 흔든 89년의 동구대변혁과 소련의 동요로 수정을 강요받고 있는 형편이다.
독자핵보유와 독일의 분단 및 미국의 소련에 대한 억제를 배경으로 유지돼온 프랑스의 유럽내에서의 정치적지위는 강력한 통일독일의 대두로 흔들린다. 서독은 유럽정치중심으로 부상중이고 통독으로 경제와 통화의 우위가 강화되면 프랑스의 유럽에서의 통제력은 약화되지 않을 수 없게 돼 있다.
더욱이 미ㆍ소가 핵대결의 반대방향으로 가면서 계속 핵탄두를 감축할 때 스스로 국지적인 핵무기사용의 미전략을 비판해온 프랑스의 입지는 더욱 악화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골리즘의 유산을 어떻게 승화해야 하는가.
최근 피가로지에 인터뷰가 연재됐던 드골장군의 아들 필립ㆍ드골은 『프랑스의 어떤 정치인들도 독일통일에 대해 구상을 밝히지 못한다』면서 『콜(서독총리) 혼자서만 말하게 내버려두고 있다』고 개탄했다.
드골은 그의 원대한 목표로서 「대서양에서 우랄까지」의 유럽건설을 밝힌적이 있다. 그의 구상은 양차대전에 시달린 유럽이 다시 카오스로 떨어지는 것을 막을 공평한 국가간의 구조를 제공하자는 것이었다.
헨리ㆍ키신저 전 미국무장관은 이러한 그의 구상은 지금 한창 EC에서 논의중인 것처럼 정치와 안보적통합의 추구로 나타났을 것으로 본다.
독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도 독일의 중심적 위치가 너무 커지는데 대처키 위해 다른 유럽국들과 협력했을 것이며 특히 유럽국 전체의 지휘하에 놓이는 유럽방위체제건설에 찬성했을 것이란 분석이다.
그는 아울러 소련의 힘의 붕괴와 독일의 대두는 미국의 유럽에서의 역할에 대한 드골의 어프로치를 반성토록 하여 나토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했을 것이란 해석도 하고 잇다.
드골은 60년 나토의 미ㆍ영ㆍ불 3자관리를 미국이 거부하자 군사기구에서 탈퇴하여 프랑스영토내에서의 나토시설철수를 명령했으며 불의 군축회담참가를 금지시켰다.
사회당인 현 미테랑대통령도 핵억지력 등에선 골리즘을 어느정도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나토가 퇴조하여 미국이 유럽에서 핵무기와 재래식 무기를 철수할 경우 서독은 그 자신의 핵무기 보유를 추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독일에서 미국이 떠난뒤 독일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전면적인 방위구상으로 군수산업을 증강할때 프랑스로선 최악의 우려가 현실화 하는 것이다.
영국의 가입을 저지함으로써 마비시켰던 EC는 이제 오히려 진정한 유럽주의의 틀속에 통일독일을 유지시키는 가장 중요한 틀이 돼가고 있다.
그렇지만 정치가이자 군사전략가인 드골은 역시 국제정치에서 깊은 통찰력과 선견지명을 보였다. 그는 늘 국제관계에서 유효한 힘이란 이념이 아니라 국가라고 강조했다.
그는 「철의 장막은 인공적이기 때문에 취약하므로 동구권 10개국을 연결하는 이념은 사라질 것이며 머지않아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에 독립적인 민주적 단일체(entity)가 대두할 것』이라고 갈파했다. 오늘의 동구를 꿰뚫어본 것이다.
60년대초에는 미국의 월남개입에 반대했으며 한국에 대해서도 월남파병을 하지말도록 촉구했다. 디엔ㆍ비엔ㆍ푸의 함락이나 알제리 독립으로 민족자결의 대세를 역류하는 것을 방관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64년엔 서방최초로 중국과 국교를 수립했다. 월남개입반대와 대중수교로 미국과의 관계가 긴장상태에 빠졌으나 5년뒤,닉슨대통령은 파리를 방문,미국이 대중외교교섭중임을 털어놓기도 했다.
68년9월 「프라하의 봄」이 짓밟혔을 땐 동구의 진보는 불가피한 것이며 후퇴는 일시적이라고 미래를 내다보기도 했던 드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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