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미움이 끈끈히 뒤엉킨채 쉽사리 땔 수 없는 얄궂은 인연을 우리는 흔히 악연이라고 부른다. 한때는 죽도록 사랑했지만 그 사랑이 식어 저주를 퍼붓는 남녀사이가 바로 그렇다.또 한솥밥을 먹는 처지이면서도 회사문을 닫아걸고 화염병에 사제포까지 쏘며 싸우는 근로자와 업주사이,기성세대와 그들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자랐으면서도 무조건 반발하며 등을 돌리려는 젊은 세대와의관계도 사실 예사 악연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총체적 난국이라며 경제비상조치격인 재벌총수들의 부동산 매각선언ㆍ은행장 전격 해임 등 사태를 보며 새삼 실감되는 악연의 전형같은 게 따로 있다. 바로 정부재벌은행 사이가 그런게 아닐까 생각되는 오늘인 것이다.
사실 세계에 널리 알려진대로 한국의 기적은 관주도 경제정책의 결실이었다. 그 때문에 특혜와 후원을 받으며 산업을 일으켜 돈방석에 앉은 재벌들 이었다. 한때 그 사람들은 국민들에겐 입지전적인 영웅들이었다. 그들 모두가 가난속에서 뜻을 일으켜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고 가난을 몰아내는데 앞장섰으니 칭송을 받는게 당연하기도 했다.
당시 은행은 막강한 당국이 재벌들에게 쏟는 집중적 후원의 창구 구실을 톡톡히 했다. 신속한 산업화와 세계적 경쟁력 확보라 명분앞에 은행문은 재벌들에겐 언제나 활짝 열려 있었다. 지원과 지불보증이 지나쳐 은행이 흔들릴때도 있었지만 그 뒤치다꺼리는 언제나 국민들 몫이었다. 정경유착의 무성한 풍문속에 은행은 당연히 두 상전을 모시게 된다. 지엄한 관치금융이니 우선 당국의 말을 무조건 따라야 했고,유착으로 더욱 막강해진 대고객인 재벌들을 또한 홀 대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은행은 두 상전의 틈바구니에서 도맡아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상전들의 눈치를 충분히 헤아려 돈을 내어줬다가도 일이 잘못되면 동네북이 되곤 했던 것이다.
금융자율화라면서 은행장 인사는 언제나 낙하산을 타기 일쑤였고 임기제라면서도 제임기를 채우고 그만둔 은행장이 드물게 되었던 것이다. 서민들에겐 턱없이 문턱이 높으면서도 위로부터의 태풍 앞에서는 언제나 자율성을 잃고 전전긍긍했던 은행의 두 얼굴을 생각하면 악연의 실체도 짐작이 가는 일이다.
지금까지 한국은행의 17대 총재중 임기를 채운 사람은 딱 3명뿐이었고 이번에 관례처럼 되어 왔던 일로 3개월만에 행장이 해임된 어느 은행의 경우에도 최근 5년여 동안에만 행장 5명이 잇따라 갈리는 파동을 겪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당국은 선거 공약을 남발,전국의 땅값을 시간만 있으면 부추겼고 재벌들은 산업자금으로 잇속이 월등한 땅투기와 재테크에 열중했고,은행은 뒷돈만 대어주고 감독에는 눈을 감은 꼴이 되었던 현실이 참 어처구니가 없다. 급기야 재벌들의 반 사회적 투기선도로 나라경제가 마구 흔들리자 그들을 자율의 이름으로 국민 앞에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던 당국이다. 나라 경제 혼란을 위한다며 실명제를 유보했던게 바로 어제인데,끝도없이 뒤엉킨 악연의 뿌리들은 언제 말끔히 정리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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