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년 가을 일본의 「상징천황」 히로히토(유인) 내외가 영국을 방문했다. 그로서는 세자시절인 21년 이래 50년만의 영국행차였다. 도중에 기착한 미국 앵커리지 공항에는 닉슨 대통령이 영접을 나왔다. 2차대전이 끝난지 26년만에 세상은 그처럼 변했다. 전쟁직후 전범으로 거명이 됐던 그가 이제는 구적국 원수의 영접을 받는다.국빈으로서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버킹엄궁에서 베푼 만찬에 참석했다. 여왕은 만찬사를 통해 『과거 두나라의 관계가 항상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었다』고 지난날의 상처에 언급했다. 그러나 만찬주빈의 답사는 달랐다. 50년전 첫 영국방문의 추억담으로 시종한 것이다. 전쟁의 피해자를 자처하는 영국이 과거사의 청산을 말하는데,가해자격인 일본은 대꾸도 하지 않은 꼴이다. 이런데 역사의식이 약하다는 일본다운 일면이 없지 않아 보인다. 이 일은 이듬해 일본국회에서마저 문제가 됐다.
이 경험은 좋은 교훈이 됐던 것 같다. 75년에 미국을 방문한 「상징천황」은 백악관 만찬에서 스스로 과거사에 언급한 것이다. 이때 그는 「자기가 개탄했던바 가장 불행했던 전쟁」이란 표현을 써서 참석자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개탄(deplore)이라는 말의 강도가 과거사를 반성하는 뜻을 잘 전달했다는 것이 일본사람들의 자평이다. 그 연설문이 일본정부의 고심작이었음은 말할 나위없다.
대개 이런 것이 「상징천황」의 「사죄」란 것이다. 그는 헌법상 일본국의 상징일뿐 아무런 정치적 권한이 없다. 헌법 이론상 그가 군주인지 아닌지,국가원수인지 아닌지도 분명치가 않다. 하지만 그는 국빈인 외국 원수의 상대역이 된다. 남보기에는 원수외교,왕실외교에 버금할 일인데,일본 사람들은 이것을 외교가 아닌 「외국교제」란 말로 얼버무린다. 그러면서 「황」자 돌림의 격식은 꽤나 찾는다. 참 까다로운 상대가 아닐 수 없다.
일본은 이런 양면성ㆍ모호성을 적절히 활용한다. 생색 낼 일에는 그를 앞세워 나라의 위신을 세운다. 거북할 때는 그의 상징성을 앞세워 그뒤에 숨는다. 책임소재마저 분명치 않을 정도로 완곡한 그의 말을 「사죄의 말씀」으로 원용하는 것이 그런 예에 든다. 86년 전두환 전대통령 방일때 우리도 이 같은 「외국교제」「상징외교」를 이미 경험했다. 그 때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상징이 본질을 가렸다」고 논평했었다.
「상징천황」은 분명 일본의 외교자산이다. 그는 국가원수인 국빈에게만 궁중만찬을 베푼다. 객은 반드시 모닝코트 정장으로 참석해야 한다. 이를 마다했던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대통령(75년),방글라데시의 라만 대통령(78년)은 오찬 대접을 받는데 그쳤다. 민족 고유복식을 고집했던 버마의 네ㆍ윈 의장도 같은 대접을 받았다. 예외는 중국의 화국봉 수상(80년). 그는 인민복차림으로 만찬에 참석했다. 이런데도 강대약ㆍ약대강이란 일본 기질이 나타난다. 혹시 우리나라 대통령이 두루마기 한복 차림으로 군중만찬에 참석하겠다고 하면,어떤 사단이 벌어질까.
나라 안 형편이 「총체적 난국」이라 해서,노태우대통령은 미국 등 북미 순방을 취소했다. 본디 상대방의 환대의사가 분명치 않았던 억지 순방의 취소는 당연한 것이지만,24일의 일본 방문은 이미 공식발표가 됐다. 그 기정사실을 왈가왈부할 것은 없겠고,방일의 필요성도 인정이 되나,이 시점에 대통령이 나라를 비우는 「시기의 부담」에 대하여,그 「까다로운 상대」가 마음에 걸린다.
우리 쪽에서는 의당 그로부터 전번보다 분명한 「사죄의 말씀」을 기대하겠지만,과연 그 기대가 충족될 수 있을까. 일본 쪽에서보면 「사죄」는 이미 한 것이고,「상징」을 정치ㆍ외교에 개입시킬 수가 없다는 핑계를 내세울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낌새는 근래 일본 국회의 대정부 질문ㆍ응답에도 나타나고 있다(한국일보 5월11일자2면).「상징천황」이 입에 담을 「사죄」의 강약이 노대통령 방일의 부담이 될 것은 틀림없다.
또 하나 분명한 노대통령 방일의 부담은 답례를 위해서도 제2대 「상징천황」 아키히토(명인)내외의 방한을 초청하게 되리란 점이다. 그것이 의례적인 것이라 하더라도,그에 대한 국내 반응이 만만찮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아키히토 내외는 60년의 방미 이래 20여회,40여개국을 방문한 「외국교제」의 실적이 있다. 전두환 전대통령도 84년 방일때 아키히토 세자를 초청한 일이 있고,86년10월 서울 아시안게임 직후로 그의 방한을 예정하기도 했었다. 그때 한국일보는 그의 방한을 반대한다는 사론을 밝힌바 있지만,지금 그의 신분과 지위는 그때와도 다르다. 나라안 형편도 다르다. 과연 그의 방한이 성사될 수 있을까.
여기에는 생각해볼 전례가 있다. 아키히토 세자 내외의 60년 방미는 아이젠하워 당시 미국 대통령과의 상호방문에 합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일은 이른바 「안보투쟁」이라는 데모소동에 밀려 취소가 됐다. 이미 등정했던 그는 예정을 바꾸어 우리나라만 방문해야하는 망신을 당했다. 그런 사태가 서울에서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은 무엇일까.
또 하나 짚어둘 것은 일본 왕실의 「외국교제」는 「상징」 답지 않은 정치와 연관이 된다는 것이다. 5공의 아키히토 세자 초청은 당시 나카소네 수상의 「전후총결산」이란 정치구호와,시기적으로는 그의 수상 임기가 걸린 총선과 밀접하게 얽혀있었다. 그래서 일본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새 「상징천황」의 첫 나들이를 서두르는 속셈이 무엇일까 짚어보게 된다.
일본이 자기네의 외교자산을 활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상징천황」의 「상징외교」가 영ㆍ미에 통하듯 한국에도 통하리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한국 사람들은 그가 「상징」하는 바의 실체를 의심한다. 그것은 겉모양을 바꾼 「천황제」요,「천황제」는 바로 침략의 첫번째 구성요소가 아니던가. 그래서 그들은 한ㆍ일간의 「상징」이 아니라,실속을 원한다. 그 실속은 과연 얼마나 채워져 있는가를 묻는다.
안됐지만,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다. 아키히토 내외초청과 그의 방한 성사 가능성에 대해서도,그래서 NO라는 해답밖에 할 수가 없다.【상임고문ㆍ논설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