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 개혁풍 “주체적 수용” 한 목소리/북한이 몸부림 친다/기술낙후 초조 “필요할땐 문 연다”한국일보 미주본사 민병용 편집국장이 1년반만에 다시 평양을 보고왔다. 88년 12월9일부터 14일까지 6일간 한국기자로는 처음 북한을 취재보도했던 민국장은 이번엔 4월10일부터 24일까지 15일간 다시 북한을 찾아 두번째 취재를 해낸 것. 이번 평양방문에서 민국장은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이후 북한의 변화와 때마침 열리고 있던 제8차 4월의 봄 친선축제(김일성생일기념),22일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등을 취재했다. 민국장의 평양 재방문기를 3회에 걸쳐 싣는다.【편집자주】
◎“자기욕구대로 살면 혼란”/주1회 소ㆍ동구 비판학습/「김정일화」가 나라의 꽃… 승계기반 확고
1년반만에 다시 찾은 평양은 어느정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방문객의 눈길이 닿는 정도의 것이면 대개가 연출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북한문제전문가의 지적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기자의 촉감에 느껴지는 「여유」까지 조작하기는 힘들터였다. 그 「여유」는 페레스트로이카의 대물결앞에서 당황하는 모습을 예상하면서 평양에 간 기자에게 다소는 의외라고 할 수 있었다.
평양사람들은 동구라파의 자유화바람에 대처하는 나름의 논리와 자세를 일단 마련해 놓은 것 같았다. 한 당간부는 그 「바람」에 대해 북한은 주체적으로 대처해 나가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다고 했고 대동강변에서 어린 딸과 산보를 나왔다가 마주친 신문기자라는 사람은 『자유화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경계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자기욕구대로 살면 혼란이 오기 때문이다』고 비교적 솔직하게 말하면서도 『동구라파는 공산주의정신이 약해서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 우리는 우리식대로 살아나가고 있다』고 주장하기를 잊지 않았다.
말하자면 동구라파의 자유화물결을 두려워하지만 거기서 얻는 교훈을 주체사상의 틀을 통해 수용해 간다는 투였다.
변화의 물결에 대비하는 것이 전국규모의 몸부림인 것 같이 느껴졌다. 다른 몇몇 시민의 말에서도 나타났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지난해 6월 중국의 민주화항쟁을 「폭란」이라고 매도했고,매주일에 한번씩 있는 학습을 통해 국제소식을 듣고 (소련이나 동구를) 비판한다고 말을 맞춘 것처럼 주장했다.
기자가 체재중인 지난 4월22일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제9기 대의원선거를 전국적으로 치렀다. 11월로 예정된 일정을 7개월이나 당겼기 때문에 김정일에게 주석직이 넘겨지는 게 아니냐는 것이 서방측의 관측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지의 표정에는 그런 징후가 일견 보이지 않았다.
한 노동당간부는 『김정일지도자에게 무엇을 더 물려주어야 한단 말인가. 이미 그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필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언제나 주석의 교시를 받고 있다』면서 새삼스럽게 권력이양을 서두를 이유가 없음을 강조했다.
또다른 당고위급 여성인사는 『주석이 건강하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지도체제는 오래 계속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정일화가 이미 나라의 꽃이 되었고 친애하는 지도자동무(김정일)를 찬양하는 노래가 수도없이 불려지는 사실등을 열거하며 김정일이 기반을 확고하게 다져놓았고 세칭 혁명2세대를 이끌고 후계자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국제화시대에서 북한이 고립되고 있으며,기술낙후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주체과학원의 한 교수는 『북한에 대해 항상 폐쇄적이라는 말을 쓰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필요한만큼 문호를 항상 개방해 왔지 폐쇄한 건 아니다. 앞으로도 갑자기 문을 활짝 여는 일도 없겠거니와 문을 완전히 닫는 일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필요할때 문을 연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국제화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대학생들에게 컴퓨터교육을 시켜야 하나 그걸 못하고 있다고 말해 그들사회의 고민을 숨기지 못했다.
해외원호사업을 맡고 있다는 한 간부는 이런저런 말끝에 『경공업에 소홀해 왔다. 그러나 90년대에는 경공업총진군… 』이라고 말해 북한이 생필품산업에 크게 뒤져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지나가면서 흘끗 보는 것만으로 깊숙한 북한의 내부를 정확히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동구라파의 대변혁이 몰고 온 쇼크를 소화해내기 위해 북한이 안간힘을 다하고 있음을 충분하게 느낄 수는 있었다.
또 1년반 전 보다는 북한이 국제화뉴스에 덜 폐쇄적이라는 인상도 받았다. 북한도 결국 변방이긴 하지만 세계의 흐름과 1백% 단절될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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