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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ㆍ19세대(신중년 세대/그들의 빛과 그림자: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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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ㆍ19세대(신중년 세대/그들의 빛과 그림자:12)

입력
1990.04.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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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각계 중추세력으로 자리/근대화­산업화­민주화에 큰 기여/“미완의 혁명 완수책임감” 비판과 균형 애써신중년세대의 중심은 4ㆍ19세대이다. 60년 4월 부정선거와 독재에 항거,이승만정권을 무너뜨림으로써 우리역사상 최초의 시민혁명을 이룩해낸 주역은 당시 대학 3년생들로 현재 51∼53세 또래이지만 중고생들까지 시위에 가담했던 것을 감안하면 45∼55세의 신 중년세대가 모두 4ㆍ19세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5ㆍ16쿠데타로 좌절과 고난을 겪었지만 「민주의 승리」라는 소중한 경험을 안은 채 4ㆍ19의 이념과 정열을 품고 사회 각계에 진출,3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사회의 중추세력으로 자리잡았다.

4ㆍ19당시 기성세대의 무능과 부정부패를 혐오하고 『기성세대 물러 가라』는 구호를 외쳤던 그들은 이제 현실 순응적 태도 때문에 신세대들로부터 「물러나야 할 기성세대」로 비난받고 있으나 그동안 우리사회의 근대화,산업화,민주화에 큰 기여를 해온 것은 틀림없다.

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미완의 혁명」 4ㆍ19의 성격규정마저 통일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4ㆍ19세대를 평가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이다. 4ㆍ19는 그들에게 자랑스러운 훈장이거나 고통스러운 멍에이다.

○전현직의원 30여명

4ㆍ19세대는 한글 세대,민족교육 세대라는 특징을 갖는다. 60년 당시의 대학 3학년생들은 46년에 국교에 입학,1학년때부터 한글로 식민교육이 아닌 민족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다. 특히 민주와 합리,실용주의를 강조하는 미국식 교육의 영향은 그들을 민주화 운동의 첫 세대로 만들었다. 4ㆍ19를 해방이후 우리말과 글로 실시된 근대적 자유민주주의 교육의 결실로 보는 견해는 그런 이유 때문이다.

4ㆍ19세대의 사회진출은 정치분야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당시의 활약을 발판으로 정치에 뛰어든 현직 국회의원은 20여명에 이르며 전직의원까지 합하면 30명이 넘는다.

일찍부터 정계에 진출한 4ㆍ19세대의 대표주자는 민주당(가칭) 창당준비위원장인 6선의 이기택의원(53). 고려대 상대 학생위원장으로 4ㆍ18고려대 시위때 결의문과 구호를 선창했던 이씨는 67년 30세의 나이로 4ㆍ19세대를 대표해 신민당 전국구의원에 당선된 이래 야당정치인으로 잔뼈가 굵었다. 이씨는 『개인적 정치적 어려움속에서도 지금까지 야당이기를 고집해 온 것은 4ㆍ19를 망각하지 말고 정치를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민자당 창당에 참여하지 않은 이씨는 『4ㆍ19세대와 젊은 세대를 참여시켜 국민적 지지를 받는 국민정당을 만드는 것이 4ㆍ19정신의 계승』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당의 민주화,체질개선및 세대교체가 민주화와 정권교체의 지름길이라는 이씨의 주장은 4ㆍ19세대가 본격적으로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는 선언으로 관심을 끌고 있다. 이밖에 야당국회의원은 평민당 신기하(49ㆍ4ㆍ19당시 전남대 법학2) 유인학(51ㆍ4ㆍ19당시 전남대 법학4),박실(50ㆍ4ㆍ19당시 서울대 정치3) 의원등이 있으며 민주당의 김광일(50ㆍ4ㆍ19당시 서울대 법대3) 박찬종(51ㆍ4ㆍ19당시 서울대 경제3)의원등도 4ㆍ19세대이다.

참여속의 개혁을 내세우며 체제에 참여한 사람들도 많다. 이들은 보다 원칙적인 다른 4ㆍ19세대나 젊은세대로부터 4ㆍ19정신을 배반하고 변절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지위향상과 함께 우리 사회의 근대화 산업화및 정치ㆍ사회적 발전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

또 4ㆍ19의 성격자체가 한가지 이념으로 통일된 것이 아니고 복합적 성격을 띤 것이었으므로 4ㆍ19세대의 현실참여도 다양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4ㆍ19세대의 체제참여는 72년의 10월 유신을 전후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때 상당수의 4ㆍ19주도세력이 유신지지 선언을 하고 고급관료나 유정회의원으로 들어갔다. 또 80년 5ㆍ17직후에도 많은 4ㆍ19세대가 정부ㆍ여당에 참여했다. 정치적 격변기마다 정통성이 결여된 정권이 4ㆍ19세대를 적극 끌어들였고 정치지향적인 4ㆍ19세대도 이를 기회로 삼아 호응했기 때문이었다.

5공시절에는 고려대 4ㆍ18시위의 주역이었던 이세기씨(53)가 민정당 원내총무,통일원장관을 맡고 서울대 정치학과 부회장과 민통련간부였던 이영일씨(51)가 국회문공위원장,4ㆍ19당시 서울대 대의원회 의장이었던 안병규씨(53)가 농수산위원장을 맡았었다.

그러나 이영일씨는 아직까지 4ㆍ19세대는 차출적ㆍ추종적 참여수준에 머물고 있고 정책결정의 핵심과정에 도달하지 못해 참여를 통한 개혁의 성과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씨는 『정부ㆍ여당에 완전한 민주화가 이루어지면 4ㆍ19세대가 주도적 역할을 하는 세력이 될 수 있을것』이라고 말한다.

서울대 정치학과 3학년일때 서울대 4ㆍ19선언문을 썼던 청와대 대변인 이수정씨(52)는 현실 참여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의견을 개진한다. 대학졸업 후 9년동안 신문기자로 일하다 관계로 진출한 이씨는 『신문기자로서의 비판적 역할도 중요하지만 시급한 근대화 과제 앞에 국외자에 머물 수밖에 없는 언론인 보다는 직접 국가발전에 참여하기 위해 관계에 들어 왔다』며 『4ㆍ19세대는 각 분야의 주어진 상황속에서 최선을 다해 왔다』고 말했다.

○재야운동 계속고집

수 없이 옥고를 치르면서도 재야운동가로서의 활동을 고집해 온 4ㆍ19세대도 적지 않다. 서울대 농대 수의학과 출신으로 오랫동안 농어촌 사회문제연구소소장으로 일해 온 이우재씨(54)는 굴절없이 재야운동을 고집해 온 4ㆍ19세대로 꼽힌다.

이씨는 최근까지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을 이끌다 지난 13일 재야 학계 문화계등 각계의 4ㆍ19세대,민중운동 세력과 함께 민중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연합 추진위(민연추)를 결성했다.

민연추는 결성취지문에서 『4월혁명이래 축적된 각계 각층의 민주세력을 결집,온 국민의 염원인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실현코자 한다』고 말해 민중의 정치세력화로 4ㆍ19혁명을 완수한다는 진보적 4ㆍ19세대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고등법원의 부장판사급과 일부 지방법원장들이 4ㆍ19 당시 법대 3ㆍ4학년이었고 검찰에서는 검사장급과 일부 부장검사들이 4ㆍ19세대로 법원과 검찰의 상층부를 형성하고 있다.

4ㆍ19당시 서울대 법대 3학년 생으로 시위대열에 적극 참가했다는 대검의 한간부는 『법조계의 4ㆍ19세대는 조직의 속성상 제약이 많았지만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입각,기본권과 인권신장을 위해 노력했고 또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며 『법조계가 유신과 5공시절을 거치면서 굴절상을 보인 것도 사실이나 이제 4ㆍ19세대에 의해 상당한 수준의 독립성이 확보돼 가고 있다』고 밝혔다.

재야법조계에서 활약하는 홍성우(52) 황인철(50) 조준희(52) 이재후(50) 안동대변호사(50)등도 4ㆍ19세대로 유신시대이래 인권문제에 높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안동대변호사는 『4ㆍ19는 나의 판단기준과 가치관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면서 『4ㆍ19세대 법조인들은 지유민주주의 가치에 투철한 세대』라고 평가했다.

언론계에 진출한 4ㆍ19세대도 오늘날 편집국장급 이상 중견 언론인으로 성장,우리나라 언론의 위상과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을 이루고 있다. 4ㆍ19세대는 대학졸업 후 언론의 비판적 기능과 활동성에 매력을 느끼고 대거 언론사에 입사했는데 이 가운데 상당수가 도중에 관계를 거쳐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70년대 중반의 동아ㆍ조선언론사태와 80년의 강제 해직사태로 언론계를 떠난 사람들도 많지만 언론계의 4ㆍ19세대는 격렬한 정치 사회변화 속에서 나름대로 비판과 균형의 자세를 견지하기 위해 애썼던 것으로 평가된다.

학계에서는 4ㆍ19세대의 활약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들은 4ㆍ19정신을 학문적 정열로 승화시켜 원숙한 학문 경지에 이르러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미국유학 1세대로 미국의 학문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나 상아탑에 안주하는 박제된 학문보다 현실에 밀착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신세대 흐름 동참도

김진균(53ㆍ서울대) 안병직(54ㆍ서울대) 이대근(50ㆍ성균관대) 양재혁(51ㆍ서울대) 조동원(50ㆍ서울대) 오세철(47ㆍ연세대) 김국태(52ㆍ추계예술학교) 신상웅(52ㆍ중앙대) 이수인(49ㆍ영남대) 하일민교수(50ㆍ부산대)등은 보다 진보적인 학문을 추구,민족ㆍ민중적 학문을 제창하는 신세대소장 학자들과 흐름을 함께 하고 있으며 이들중 상당수가 민연추 결성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의 학문적 출발점은 오늘날의 학문은 사회변혁 운동과 긴밀하게 연계돼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계의 4ㆍ19세대는 4ㆍ19의 엄청난 충격을 예술로 승화,50년대의 식민문학과 서구문학의 영향을 극복하고 인간과 사회및 역사를 자각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 중대한 전환을 이루었다. 김승옥(51) 이청준(51) 박태순(49) 김지하씨(49)등은 4ㆍ19당시 서울대 문리대 1학년생들 이었고 이문구(49) 한승원씨(51)등은 서라벌 예대 1학년으로 대부분 60년대 중반 이후 문단에 등단,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특히 4ㆍ19세대 작가들은 60년대 후반 「창작과 비평」「문학과 지성」등 양대 문학 잡지를 통해 참여와 순수 논쟁을 벌이며 민족ㆍ민주,민주시민 사회이념을 문학속에 정착시켰다.

70년 5월 「사상계」에 발표된 김지하의 담시 「오부」은 4ㆍ19세대가 5ㆍ16군부 세력에 본격적으로 저항의 포문을 연 사건으로 이후 반독재 민주화 투쟁대열에 4ㆍ19세대 문학가들이 선봉에 서는 계기를 이루었다. 4ㆍ19세대 문학인들은 또 분단과 민족통일 문제를 문학의 중요한 테마로 부각시켰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들어 민중문학의 심화와 함께 노동문학이 민중문학의 심화와 함께 노동문학이 민중문학의 핵심을 이루면서 4ㆍ19세대 작가들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소설가 박태순씨는 『문학은 늘 젊은 세대의 몫인 만큼 문학현장에서 50대에든 4ㆍ19세대의 역할이 감소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식민시대에 태어나 6ㆍ25와 분단 고착화 과정및 4ㆍ19를 경험한 세대로서 분단구조의 허구성,통일운동의 방향을 부각시킴으로써 젊은 세대에게 민족문제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책임과 역할이 대두되고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30년투병 부상자도

이밖에 젊은날 독재에 피로 맞섰던 수많은 4ㆍ19세대 중에는 4ㆍ19의 정신을 간직한 채 개인사업을 하거나 한사람의 건강한 민주시민으로 현실의 삶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4ㆍ19의 진정한 정신은 이들 평범한 시민들의 건강한 삶 속에서 구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4ㆍ19의 상혼으로 30년을 고통받고 있는 4ㆍ19상이자들도 많다. 서울 강동구 둔촌동 보훈병원에는 당시의 부상으로 투병중인 환자가 6명이나 있다. 5127호에 입원중인 정형태씨(54)는 당시 동국대 법학과 3년생으로 경무대 앞에서 시위 중 경찰의 곤봉에 맞아 두개골 파열과 전신마비로 6개월 동안 치료를 받고 퇴원했으나 완치되지 않아 3년에 한번 꼴로 수개월씩 입원치료를 받아왔다. 이번에는 두통 고혈압 만성간염증세로 10개월째 입원치료를 받고 있다. 정씨 옆 병상의 이형송씨(47)는 당시 전주 영생고 3년생으로 고향 광주에서 시위에 참가했다가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다리를 절단했으나 수술부위의 뼈가 자라 피부를 뚫고 나오기 때문에 22차례나 뼈를 잘라 내는 수술을 받았다.

보훈병원 정신병동에는 상태가 심각해 면회조차 안되는 정신병 환자도 4명이나 된다.

4ㆍ19세대는 대체로 4ㆍ19가 민주화 민족통일 그리고 분배정의를 지향했으며 이같은 이념이 아직 실현되지 않은 채 미완의 혁명으로서 4ㆍ19는 계속 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4ㆍ19세대는 30년동안 각계에서 쌓은 경험과 원숙한 지혜로 분출하는 신세대의 사회변혁 열정을 수렴해 4ㆍ19혁명을 완수해야 하는 역사적 책임을 지고 있는 세대다.

□특별 취재반

이계성 유승우 김경철 김승일 유성식기자(사회부) 이기용기자(사진부)

◎관련단체 현황/상이자회 유족회 4ㆍ19회 「혁명기념사업회」결성/학계인사모인 「학연」 각 대학주동자 모임「무명회」도

4ㆍ19관련단체중 역사가 가장 긴 것은 4ㆍ19의거상이자회 4ㆍ19의거유족회 사단법인 4ㆍ19회등 3개 단체. 이들 단체는 자유당시절 「서대문경무대」로 불렸던 서울 종로구 평동 이기붕의 집자리에 세워진 4ㆍ19도서관에 사무실을 두고 4ㆍ19기념사업을 주관해 왔다.

이들 3개 단체는 올해 4ㆍ19 30주년을 맞아 정계 학계 사업계등의 4ㆍ19세대와 함께 「범 4ㆍ19혁명 기념사업회」(회장 이태섭의원)를 결성했다.

범 4ㆍ19혁명기념사업회는 지난 6일부터 30주년기념사진전을 열어 공개되지 않았던 사진등 4ㆍ19당시의 사진 1백4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또 지난 17일 프레스센터에서 「4ㆍ19혁명정신계승발전방향」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고 6월말까지 심포지엄발표 논문과 지금까지 나온 4ㆍ19관련 글을 모아 기념논총을 펴낼 예정이다. 기념사업회는 앞으로 3개단체를 통합,재단법인을 만들어 장학사업등 사회사업을 벌이고 기존단체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을 회원으로 받아 들임으로써 4ㆍ19세대의 실질적 구심체를 이룩한다는 계획이다.

4월혁명연구소(소장 김진균서울대교수)는 4ㆍ19주도 세력중 학계에 진출한 사람들과 재야활동을 해온 세대가 4월혁명이념의 올바른 정립과 구현방안연구를 통해 민주ㆍ자주ㆍ통일에 기여한다는 취지로 88년 6월 창립했다. 이 연구소에는 김진균(서울대) 오세철(연세대) 양재혁(성균관대) 이대근(성균관대) 신상웅(중앙대) 하일민(부산대) 김국태교수(추계예술)등 대학교수 14명과 박태순 김만옥씨등 작가,이우재 전대열 곽태영씨등 재야운동가,김시현 손병선씨등 개인사업종사자등 60여명이 가입해 있다.

이 연구소는 18일 연세대 1백주년 기념관에서 「한국사회의 변혁운동과 4월혁명」을 주제로 학술발표회를 갖고 이어 「4월혁명가」 발표등 문화제 행사를 했으며 30주년 논문집과 자료집을 발간해 냈다.

무명회는 4월혁명 당시 각 대학의 주동학생들이 30년동안 우의를 다져온 모임. 오랫동안 명칭이나 회칙도 없이 송년회 형식등으로 만나오다 10여년전에 「무명」이라는 뜻과 순백의 「면」이라는 뜻을 담아 한글로 무명회라는 명칭을 붙였다는 것이 간사인 안동대변호사의 설명이다.

이 모임에는 정계에 진출한 4ㆍ19세대,전ㆍ현직 여야국회의원,변호사 학계인사등 각계의 2백여명이 참가하고 있다.

이 모임은 지난 11일 프레스센터에서 「4월혁명과 오늘의 과제」를 주제로 30주년 기념 토론회를 열었다.

이밖에 지역별 학교별로 4ㆍ19세대는 비공식적 모임을 형성,친목을 유지하고 있다. 고려대의 4ㆍ18세대는 18일 하오 고려대 교우회관에서 57∼60학번이 참석한 조촐한 30주년 기념식을 갖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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