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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책임 아직 끝나지 않았다/대일 보상청구운동확산: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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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책임 아직 끝나지 않았다/대일 보상청구운동확산:7

입력
1990.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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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정신대/감춰진 비사… “20만명 희생”/일 “수치” 기록 철저 인멸/“오욕” 배상 요구도 전무/빨래터서 끌려간 15세소녀 하루 3백명 상대도… 생환자 드물어여자 정신대의 비극은 일본에는 물론 한국에도 공식문서 한장 남아있지 않아 역사의 장에서 소멸돼 가고 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기간중 강제연행한 여러형태의 인력 가운데 정신대 부분을 가장 부끄럽게 여겨 철저히 기록과 증거물들을 인멸한 때문이다.

10만명이라고도 하고 20만명이라고도 하는 여자정신대원 가운데 살아 돌아온 사람도 적지만 살아온 사람들도 여자로서의 치욕스런 과거를 숨기고 싶어 입을 떼지 않기 때문에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목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있다. 다만 태국 오키나와등지에 남아 한많은 여생을 보내고 있는 몇몇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인간으로서 동물적인 박해를 받았던 당시의 상황들이 단편적으로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지난 84년 5월 4박5일간 고국을 방문했던 노수복할머니(69ㆍ태국 송클라주 하차이시)는 22세때 부산 근교의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일본순사에게 붙잡혀 포승줄에 묶인채 정신대로 끌려갔다. 순사는 일부러 물동이를 깨뜨려 옷을 적신뒤 이를 트집잡아 끌고 가서는 5,6명의 처녀들과 함께 남방전선으로 보냈다.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수 없는 간난과 치욕적인 수모끝에 종전을 맞아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만신창이의 몸으로 귀국할수 없게된 노씨는 태국에 주저앉아 중국청년과 결혼,현재 태국에서 한많은 여생을 보내고 있다.

「황국사절단」으로 남방전선에 보낸다던 일제는 그들을 이부대 저부대로 끌고다니며 위안부 노릇을 강요했다. 낮에는 빨래하기ㆍ탄약나르기등 고된 노역에 동원됐고 저녁이면 야수같은 일본군 장병들의 노리개가 되어야 했다.

따뜻한 나라에서 배불리 먹여주고 돈도 준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오키나와 전선에 끌려갔던 배봉기할머니(76)는 지금 오키나와에서 자신의 모진 운명을 저주하며 혼자 살아가고 있다.

포연탄우 속의 참호안에서 일본군 병사들과 함께 행동해야했던 배할머니는 하루 1백명이나 되는 일본군을 상대했지만 돈한푼 만져보지 못했다. 함께 끌려간 6명의 동료가운데 3명이 죽고 다치는 극한 상황속에서 목숨을 부지한 것만도 다행으로 여겼으나 일본의 패전후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군상대 위안부 생활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일본군으로 징병당해 중국전선에 투입됐던 전 한국건축가협회장 최창규씨(71)는 전선에서 한국인 정신대원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한 증인이다.

건축공부를 한 최씨는 육군기수라는 보직 때문에 부대안의 위안소를 짓는 일에 종사했는데,강제로 끌려온 어린 처녀들이 하루 3백명의 일본군을 상대하다 병들어 죽고 자살하는 참상을 보다 못해 부대를 탈출했다고 말했다. 판자로 지은 간이막사에 돼지처럼 갇힌 방문앞에는 언제나 동물적인 배설욕구에 눈이 뒤집힌 일본군 장병들이 장사진을 이루곤 했다고 최씨는 악몽같은 과거를 회상한다. 식사할 시간조차 없어 누운채 주먹밥을 먹어가며 「야수」들을 상대했다는 그의 증언은 인간이 과연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끔찍한 답변이다.

태평양전쟁 말기 6천명의 노무자와 1백11명의 정신대요원을 붙잡아 전쟁터로 보냈음을 고백한 일본인 요시다ㆍ세이지씨(길전청치ㆍ78)는 밭에서 일하는 시골처녀들까지 무차별로 잡아갔었다고 말했다. 14년전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이라는 참회수기에서 요시다씨는 노무보국대 동원부장으로 일하던 1944년 4월 18세 이상의 처녀를 최대한 동원하라는 명령에 따라 몸매만 성숙하면 15∼16세 처녀들까지 끌어다 나이를 속여 전선으로 내몰았다고 고백했다.

위안부라면 아무도 말을 들을 사람이 없으므로 『대마도에 있는 군인병원에 잡역부로 취직하면 월급을 30원씩 받는다』고 속였다는 것이다. 그가 속해 있던 노무 보국대의 공식 기록을 철저히 소각하라는 명령에 따라 메모쪽지 하나까지 모든 서류를 불태웠다는 고백도 잊지 않았다.

요시다씨처럼 뒤늦게 과오를 뉘우치고 한국에 사죄의 뜻을 표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관계자들은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있는 것이 더욱 문제이다.

지난 2일 파리에서 폐막된 제12회 국제여성영화 페스티벌에서 우수영화로 뽑힌 일본의 기록영화 「전쟁의 딸들」에 나오는 당시 일본군의 고급참모 한사람은 정신대동원을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일본에는 왜 정신대에 관한 기록이 없느냐』는 물음에 그는 『정신대는 쌀이나 의복같은 군보급품의 하나였다. 보급품은 다 써서 떨어지면 그만이지 무슨 기록이 필요한가』라고 천연스레 답변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한국에 대해 보상을 해야 하지 않는냐는 물음에 대한 당시 한 막료의 답변이다. 『보상할 것이 뭐가 있는가. 우리는 아무 나쁜짓도 하지 않았다. 다만 전쟁의 장만을 잠시 빌렸었을 뿐이다』【문창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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