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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책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일 보상청구운동 확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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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책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일 보상청구운동 확산:2

입력
1990.03.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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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명쓴 전범:하/일도 한도 외면 “우주미아 40년”/석방후 비참한 생활… 정신병에 자살까지/57년 보상요구에 일 정부 겨우 5만엔뿐/최근 법적투쟁 다시 준비연합국 전범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한국출신 포로감시원들은 싱가포르 창기형무소에서 복역을 시작했다. 이형무소 P홀에 사형수들이 수용됐고 한국출신 전범사형수 23명중 10명이 바로 이곳에서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형무소 미결감에 1년간 수용됐다가 석방된 충남서천출신 김승규씨(72)가 이들 한국출신사형수들의 마지막 글을 받아 45년간이나 소중히 보관,억울한 사형수들의 통곡하는 심정을 오늘에 생생히 전한다.

김씨는 『재소자들의 급식으로 나오는 비스킷포장지를 모아 P홀배식담당에게 건네줘 사형수들의 절필을 받아오게했다. 어떻게든 고국에 돌아가 유족들에게 글로나마 그들의 마지막을 전하고 싶었다』고 당시의 심경을 말했다.

처형후 유해가 이국땅을 떠돌다 지금은 동료들의 도움으로 천안 망향의 동산에 안장된 천광린의 절필은 다음과같다. 「싱가포르 영군군법회의 제6법정에서 사형선언,46년 7월23일. 고려 인민공화국,영원만세. 청춘27세 비명 천광린」

천주교 신자였던 장수업은 「남방군속3년에 사형언도 당했네. 은혜모르는 영국 화란포로때문에 이세상 떠나는구나. 그러나 나는 그들을 조금도 악설치않노라.하나님께서 사랑을 주장하셨는데 전쟁을 발기한 일본군에 종군한것이 죄라고 생각한다. 조국이 독립하는데야 무슨원이 또 있을까」라고 적었다.

창기형무소에 있던 한국인 전범들은 50년부터 51년사이 일본 스가모형무소로 이송된다. 52년4월28일 미일간의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이 발효될 당시 연합국이 관리하던 스가모형무소에는 한국인 29명이 수감돼 있었다.

그이전에 창기형무소에서 가석방된 사람도많고 일부는 스가모이감이후 가석방됐다.

샌프란시스코조약을 계기로 식민지출신은 일본국적이 상실됐다. 이조약 제11조는 「일본국은 일본국에 구금돼있는 일본인전범에 대해 연합국이 부과한 형을 집행한다」고 규정했다. 따라서 수감중이던 한국인전범들은 「일본국적을 상실해 조약에서 규정한 일본인전범이 아니므로 계속 구금될 법률상 근거가 없다」고 주장,석방청구소송을 냈다.

그러나 52년7월30일 일본최고재판소는 「형이 과해질때 일본국민이었다면 조약발효후의 국적상실이 영향을 미치지않는다」고 이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일본국적을 상실했으므로 보상을 해줄수없다는 논리와 정반대의 논리로 석방조차 거부한것은 자의적인 법적용의 대표적 사례이다. 한국인 전범들은 57년4월 김창식씨를 끝으로 모두 출소했지만 이들의 앞길은 막막하기만 했다.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가석방자 신분은 보호관찰대상이어서 꼼짝할수도없고 일본에는 아무런 연고도없어 당장의 생계가 문제였다. 이비참한 상황에서 가석방자 2명은 자살했고 이영길씨(75)는 정신병발작을 이르켜 지금까지 천엽현 국립시모후사요양원에 수용돼있다.

한국출신전범자들이 뭉친 동진회는 57년8월 일본정부를 상대로 『일본정부는 ▲우리를 강제징용하고 ▲특히 2년간의 계약기간을 이행치않아 종전후 연합국에 구금되게 했으며 ▲연합국과의 조약체결시 제 3국인의 입장을 전혀 고려치않은 책임을 지라』고 주장하며 사형자1명당 유가족에 5백만엔,복역자에는 복역일수 1일당 5백엔씩을 지급할것을 요구하는 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발뺌으로 일관했다. 같은전범신세였던 기시ㆍ노부스케(안신개) 내각때 1인당 5만엔과 동경도영주택우선 입주자격을 주고 동진회앞으로 택시10대의 영업권을 내준것이 고작이다.

65년 한일협정이후에는 아예 『모든것이 양국간 협정으로 일괄타결됐다』며 종전의 교섭에 응할것같던 태도마저 싹 거두어들였다. 한국정부역시 그동안 『대일청구권대상은 45년8월15일이전의 사항이므로 전범같은 전후문제는 제외된다』는 태도를 보여왔다. 전범들은 자신들 표현대로 「우주에 떠있는 존재」로 지내오면서도 그동안 처형당한 동료들의 유골을 고국으로 송환해왔다.

동진회회원들은 최근 지난 57년 일본정부를 상대로 일으켰던 보상요구투쟁을 재개하려고 준비중이다.

한편 같은 포로감시원으로 끌려갔다가 전범이란 오욕만은 면하고 천신만고끝에 귀국한 사람들은 친목단체인 토요회(회장김동근)를 만들어 서로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들가운데 전정근씨는 자신과같은 남방포로감시원 출신들의 생생한 증언을 기록한 「절규」라는 책을 지난 연말 펴냈다.

토요회 회원들 가운데도 장기징역을 언도받아 옥살이를 하던 사람들이 몇사람 포함돼 있지만 동진회 회원들처럼 보상투쟁을 할 생각은 못하고 있다. 치가 떨리는 과거사를 떠올리기도 싫다는 것이 그들의 한결같은 생각이다. 그러나 동료였던 동지회 사람들의 투쟁을 심정적으로 지원하면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일본측의 반응을 주시하고있다.【동경〓최규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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