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중국이나 일본에 사신을 보낼 때는 임시직인 삼사로서 사절단을 구성했다. 정사와 부사와 서장관이다. 이중 서장관은,당연히 그서열이 정사ㆍ부사보다 못하나,그 지위가 독특했다. 그는 외교문서ㆍ기록을 관장하는 실무책임자이면서,외방에 나아가 임금의 특명을 집행하는 행대어사를 겸한다. 그래서 서장관의 별칭을 행대라고 한다. 어사라고 했으니,그는 임금의 특사격이다. 대개는 글재간과 실무능력이 뛰어난, 젊은 당하관을 골라 쓴다.삼사가 등장하는 역사적인 한장면을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워 익히 알고 있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선조23년) 우리나라는 한동안 뜸했던 통신사를 일본에 보낸다. 정사는 정3품인 중구대유지 황윤길. 세종때의 명신 황희정승의 후손인 그는 당년54세,41살 나던 해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중국을 다녀온 경력이 있다. 부사는 종3품인 성균관사성 김성일. 정사보다 두살 연하인 그는 퇴계문인으로 성리학에 밝은 선비다. 일본에서 풍신수길을 만나고, 이듬해 부산으로 돌아온 일행은 곧 장계(서면보고)를 올린다. 왜병의 침공이 있으리란 것이다. 그러나 서울로 올라온 이들의 구두보고는 한결같지가 않다. 정사는 전쟁이 임박했다고 하는데,부사는 그렇지 않다고한 것이다. 서인인 정사와 동인인 부사간의 당파심이 그런혼란을 빚었다는 것이 교과서의 해석이다.
그러나 부사는 정사의 말이 너무 다급하고 민심이 하도 흉흉해서,그와 반대되는 말을 했노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또 사행중 교섭이 떳떳했다고 해서 선사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한다. 그는 외교는 잘했으나 내교에서 실수를 저지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때 사행의 서장관은 종6품인 성균관 전적 허성이다. 당시 42살이던 그는 부사와 같은 서인이면서 정사편을 들어,당파에 얽매이지않는 인품으로 칭송받았다. 그는『홍길동전』을 쓴 동생 허균,여류시인 허난설헌과 더불어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 났던사람이다.
벌써 4백년 묵은 이런 일을 여기 옮겨 적는데 무슨 각별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민자당 방소단의 왕래를 보면서,오래전 교과서에서 읽은 한 대목이 생각났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방소단일들을 듣고 보자니,김영삼최고위원은 옛날 사행의 정사,방소단에 부사는 없고,박철언정무장관은 서장관에 해당할 듯 한것은 사실이다. 이 비유가 꼭 들어 맞는것인지는 모르겠으나,대통령의 서장(편지)〓친서를 품고 다녔던 사람을 서장관이라 하는 것은,그직명의 글뜻에도 들어맞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방소단을 내내 따라 다닌 잡음은 삼사간의 생각과 말이 어긋났던 옛 일과도 흡사해진다. 방소단이 떠나기전 「동행」과「수행」의 시비는 서장관이 삼사의 한 사람이기보다는 행어대사임을 강조한데서 온 것이 아니겠는가.
지나서 하는 말이라 쑥스럽기는 하지만,이번 방소단은 처음부터 잡음의 소지를 안고있었다. 무엇보다도 구성이 잡다하고 아무역할도 없는 인원이 너무 많다.
정당 대표단에 「정부대표」도 끼고 기업인대표도 끼어있다. 들리는대로 하면 「정부대표」박장관은 김위원이 간청하여 방소단에 끼었다. 김위원은 그를「수행원」으로 요청했던 모양이나,결과적으로 그는 「정부대표」가 됐다. 대통령의 친서는 소련즉 채널의 시사를 따라 김위원이 요청한 것이고,권력핵심에서는 친서에 인색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결국 친서는 박장관이 지니게 됐다.
여기 분명한 것은 외교에 드리운 내교의 그림자다. 복합체적인 민자당의 집안 사정과,집권당 총재이면서 국가원수인 대통령의 양면성을 방소단은 반영하고 있다. 대통령의 그 한 면을 김위원이,다른 한 면을 박장관이 대표한 셈이 된 것이다. 축구에서 흔히 말하는 「투톱」작전과 모양은 같다.
그러나 「투톱」간에 대화는 없다. 대사급수교에 앞선 중간단계(대표부 또는 총영사관)가 바람직하지않다는 정부의 기본방침마저도 김위원이 제대로듣거나 이해하지 못했음은,저쪽의 총영사관 제안을 선뜻 받아들인 그의 태도가 증명한다. 고르바초프 면담에 관해서도 양자간에 협조가 있은 흔적은 없다. 그보다 양자는 각자의 측근을 동원하여 각자의 교섭채널을 더듬고,각자 다른판단을 했던것같다. 그 채널이 상당부분 중복됐음직도 한데,더듬기에 나섰던 사람들은 지금 서로 남의 채널이 별것 아니더라고 한다.
여하간 뚜껑을 열고보니,방소단은 뜻밖의성과를 올렸다. 그성과를 평가하는데 인색할 것은 없다. 그러나 「뜻밖」이라는 말은 다분히 그성과가 상대방 페이스의 결과임을 암시한다. 김위원과 고르바초프의 만남도 그런 페이스로 이루어졌다. 10분미만의 시간여유를 주고,남의 나라 집권당대표를 부른 것은 외교가 아니다. 김위원의 대응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만남은 회담이 아닌「뜻밖의 조우」나 같다. 미리 준비를 했다고해도 친서를 전하고 선물을 교환할 그런 격식이 못된다. 고르바초프는 이렇게해서,끈질긴 회담요청과 대북한관계 사이의 난제 하나를 풀고,분명한 신호를 발신했다. 우뚝한 것은 페이스ㆍ메이커 고르바초프뿐이다.
사정이 이런데,이제와서,이만남이 회담이네 아니네 하는 따위 뒷공론은 우물안 쟁명에 지나지 않는다. 저쪽 페이스에 들뜬나머지 벌써부터 한소정상회담,고르바초프의 서울방문 운운하며 한반도의 전쟁위험이 당장에 가신듯이 말하는 것은 또 너무 성급하다. 문제는 이제부터 고르바초프의 신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응신하느냐다. 그의 신호가 선심의 발로일 수만은 없는것인즉,우리는 그가 연출한「뜻밖의 조우」에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한다. 대신에 우리가 받을,그 대가의 대가를 냉철하게 계산해야한다. 요컨대 우리스스로 셈을 놓고 스스로의 페이스를 찾는 것이다.
이번 방소단은 성과와 과제를 함께 남겼다. 교훈도 남겼다. 그 교훈의 으뜸은 아마추어 외교의 한계다. 여기에는 우리 투의 정당외교,밀사외교가 모두 포함된다. 사실 이번 방소단활동을 전후한 잡음은 외교전문가를 철저하게 배제한 아마추어성에 연유한것 아닌가. 아마추어외교와 아마추어적인 보도가 아마추어적인 북방열기를 자아낸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대소수교협상에 비외교분야의 정무장관을 다시 내세운다고 보도되고 있는것은 또 무슨 뜻인가.
외교는 일단 외교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상도다. 지금 단계의 북방외교를 굳이 그 예외로 삼아야 하는 까닭을 알수가없다. 【상임고문ㆍ논설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