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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4 유혈 불구 미ㆍ중 관계 낙관”(닉슨 회고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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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4 유혈 불구 미ㆍ중 관계 낙관”(닉슨 회고록:3)

입력
1990.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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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춤한 등 개혁 결국 확산될 것/작년 10월 방중 “악화된 관계 개선해 영예회복” 욕망/귀국후 부시에 “개혁파 타격위험… 고립화 불가” 강조내가 6번째 중국을 방문한 89년 10월은 천안문 유혈진압사태로 인해 미중관계가 극도로 악화돼 있던 시기였다.

당시 주위에선 나의 중국방문을 극구 만류했다.

내가 중국지도자들과 만나 술잔을 나누는 것이 자칫 나의 미국내 반대자들의 무자비한 비난을 살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였다.

그러나 나는 미국인들이 얼마나 현실적인 국민인가를 알고있다. 그들은 TV로 생생히 중계된 천안문의 비극에 분노하면서도 내심으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지닌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시켜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나 또한 악화된 양국의 관계개선에 한몫을 함으로써 역사적인 미중관계수립의 공로자로 찬양받았던 72년의 영광을 되찾고 싶다는 현실적인 욕망이 있었다.

지난 72년 2월27일은 7일간의 중국방문을 마치며 주은래와 미중수교를 기념하는 축배를 들었던 날이다. 주은래와 나 두사람은 그날 정상에 올라서 있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순간 한사람은 불명예스러운 대통령직 사임을 강요당하고 또 한사람은 암에 걸려 운명을 달리하리라는 불과 4년뒤의 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제 중국의 옛 친구로서 내가 할일은 틀어지고 있는 양국관계를 바로잡는 것이라는 믿음 또한 나의 중국방문을 부추겼다. 내가 귀에 거슬리는 충고를 하더라도 중국의 지도자들은 나에 대한 예우로써 그말을 경청할 것이란 기대가 이러한 자신감의 바탕이 됐다.

나는 나의 중국방문에 당파를 초월한 중요성을 부여하기 위해 카터행정부에서 최고의 중국전문가로 활약했던 미첼ㆍ옥센버그 박사에게 동행을 부탁하는 한편,출발에 앞서 민주ㆍ공화 양당 상원의원들과 충분한 협의를 했다.

북경에서의 4일은 대통령직을 물러난 이후 가장 바쁘게 보낸 시간이었다. 등소평 이붕 강택민 등 최고위급 지도자들과 잇달아 20시간이 넘는 대화를 갖는 가운데 나는 줄곧 3가지 목적을 염두에 두었다. 우선 천안문사태로 야기된 미국내의 반중무드를 전달하고,중국측이 이에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할 필요성을 설득한다. 다음은 몇달간 국내문제에만 골몰해온 중국지도자들의 관심을 국제문제의 영역으로 이끌어 낸다. 끝으로 미중관계의 장래에 대화의 초점을 맞춘다.

10월31일 마침내 나는 중국의 실권자 등소평과 마주 앉았다. 이 자리가 등과의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르며,어쩌면 내가 은퇴하기 전의 등을 최후로 만난 서방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미국의 언론들은 이때 벌써 등을 「피에 굶주린 악당」으로 매도한지 오래였다. 나도 솔직히 수세에 몰려 초췌해진 등의 모습을 예상했다. 아닌게 아니라 그의 모습은 4년전 보다 눈에띄게 수척해 보였다. 대화도중 그는 2명의 통역사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중 한명은 등의 왼쪽귀에 바짝 입을 갖다대고 큰소리로 대화내용을 옮기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대화가 진행 될 수록 나는 등의 예리함이 조금도 녹슬지 않았고 원기 또한 여전히 왕성함을 깨닫게 됐다.

등과 대화를 갖기 전에 만난 고위지도자들은 한결같이 「결자해지」라는 중국 속담을 인용하며,양국관계의 악화책임은 전적으로 중국의 내부문제에 과잉반응한 미국측에 있다고 되풀이 주장했다. 그러나 등은 훨씬 노련했다. 그는 노회한 혁명가의 경륜이 짙게 배어있는 어조로 양국 관계개선을 위한 미국의 이해를 촉구했다. 『미국은 강하고 크지만 중국은 약하고 작다. 나는 체면따위엔 신경을 쓰지 않지만 나와 내동지들이 수십년간 외국의 침탈을 겪었던 중국의 자존심을 지키지 못할 경우 우리 모두는 설 땅을 잃게된다. 이것은 역사의 보편법칙이다』라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않고 3시간 동안 이어진 등과의 대화를 통해 나는 천안문사태의 여파가 얼마남지 않은 등의 집권기간을 어둡게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대국 지도자로선 처음으로 공산주의의 경제실패를 간파하고 극적인 개혁에 착수했던 등소평이 여전히 이시대의 가장 탁월한 정치지도자의 한사람이라는 나의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이붕 총리나 양상곤 국가주석 등 강경파 지도자들이 중국의 내부문제에 대한 외국의 간섭에 대해 분개하는 것은 일면 당연하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국은 지금 다른 나라들과의 우호관계를 통해 중요한 이익을 얻고 있는 것도 부인못할 사실이다.

그런만큼 중국은 이제 인권문제처럼 우방과의 관계에 민감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 대해선 세심한 주의를 쏟는 방법을 배워야한다.

내가 중국을 떠난후 계엄령이 완화되고 미대사관 앞에 설치됐던 AK47 기관총이 철거되는 등 고무적인 몇가지 조치가 취해졌다. 나는 이같은 사소한 조치가 곧 양국관계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다. 내가 진실로 미 중관계의 앞날을 낙관하는 근거는 지금은 다소 주춤거리고 있는 등소평의 개혁정책이 결코 완전히 멈추지는 않을 것이며 종국엔 정치개혁으로까지 연결될 것이라는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귀국 후 부시 대통령에게 절대 중국을 고립시키는 정책을 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고립화정책은 등소평의 은퇴 이후 첨예화될 개혁­보수파간의 권력다툼에서 개혁파쪽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등소평의 개혁정책을 계승하고 서방과의 문호를 터놓으려는 중국의 개혁파 지도자들에게 미국의 협조와 지원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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