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독 염원 정확히 포착… 정강 채택/음악가 거쳐 변호사로 정치 입문『이번 선거는 동독의 마지막 폴크스캄머(의회) 선거이다』 독일연합의 예상 밖 압승으로 동독 차기총리가 될 것이 확실해진 동독기민당(CDU) 로타르ㆍ데메지에르 당수(50)의 승리 제1성은 동독의 마지막 총리로서 그가 처하게 될 아이러니를 확인시켜 준다.
조속한 통일이라는 독일연합의 공약사항을 실천하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임기를 하루라도 더 빨리 단축시키는데 전력을 다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콜과 라퐁텐느(서독 사민당 차기총리 후보)의 대결이라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로 이번 동독총선은 서독 여야의 대리전 양상을 띠었다. 따라서 독일연합의 승리는 「자매당」에 대한 인적ㆍ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콜 서독총리의 승리라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을 십분 감안한다 해도 독일연합의 승리에서 데메지에르의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 만은 없다.
데메지에르는 동독의 24개 정당 지도자중 독일민족의 통일염원을 가장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지난해 11월2일 당시까지만 해도 공산당의 4개 위성정당중의 하나에 불과했던 CDU의 의장으로 취임한 그는 일련의 당개혁작업을 과감하게 실천해 나갔다.
CDU를 공산당의 충실한 위성정당으로 간주해온 콜 총리의 불신을 해소시키기 위해 이질적인 독일사회주의동맹(DSU)과 민주출발당(DA)과 서슴없이 제휴,독일연합을 구성함으로써 서독기민당의 자매정당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했다.
선거 불과 7주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결국 이러한 데메지에르의 신속한 대처에 힘입어 베를린장벽 붕괴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3∼5%의 지지 밖에 받지 못했던 CDU는 불과 4개월 후에 치러진 총선에서 40.91%의 압도적 지지를 얻게된 것이다.
서독과의 접경도시인 노르트하우젠시에서 2차대전 발발 다음해인 40년에 출생한 데메지에르는 17세기 종교탄압을 피해 프랑스에서 망명한 개신교 위그노교도의 후예이다.
그는 16살에 기민당에 입당했지만 종교적 신념때문에 정치로 입신하기 보다는 음악가의 길을 택했다. 20살되던 60년부터 15년간 여러 오케스트라단을 전전하며 비올라주자로 활약했었다.
75년 팔의 신경계통에 이상이 와 연주가로서 더이상 활동하지 못하게 되자 그는 변호사로 전신했다. 그는 종교적 신념때문에 징집을 거부한 사람들을 주로 변호하면서 인권변호사로 명성을 쌓았으며 82년 베를린변호사회 부회장을 거쳐 89년 11월에는 전국 변호사회 회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모드로 총리의 과도내각에서 종교담당 부총리를 역임한 그는 눌변에다 학자풍의 왜소한 외모로 유세기간중 콜 총리에 압도돼 자신의 존재를 뚜렷이 부각시키지 못했었다. 오케스트라에서 화려하지 못했던 비올라주자로서의 역할처럼 데메지에르는 한나라의 총리로서도 콜 총리의 통독추진 작업에 화음을 맞춰주는 조연의 운명에 만족해야 할지 모른다.【유동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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