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교의 북방러시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수교를 향한 대소련 러시는 지금 절정을 이루고 있는것 같다. 민자당의 김영삼최고위원이 민자당뿐 아니라 정부와 재계의 인사들까지 거느리는 대규모 방문단을 끌고 소련에 간다고 야단들이고 북방외교의 밀사역을 맡았던 박철언 정무장관까지 함께 간다고 더욱 법석이다.이처럼 부산한 소련행차를 보는 국민들은 금방 소련과 외교관계가 맺어지는 듯한 착각을 느낄정도로 기대에 부풀어 있는것 같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대소외교를 전시효과 위주로 너무 요란하게 벌인다는 우려와 함께 우리가 너무 일방적으로 소련에 매달리는 듯한 저자세의 인상을 준다는 지적도 있다.
수교를 위한 적극공세를 펴다보니 그런 느낌을 주는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지난주 국회본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박정수의원(민자)은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신혼여행부터 가자고 서두는 것 아니냐』고 비꼬기도 했다.
한소관계는 미북한 관계개선과도 함수관계를 갖기 때문에 한국만의 일방적인 노력으로 수교가 당장 실현되기는 어려운 실정인데도 금방 봇물이 터질듯 떠들어대는 것은 확실히 문제이다.
그보다 더큰 문제는 우리가 아쉬운듯 매달리는 것보다 이제는 상대방이 싫어 하더라도 우리가 할 얘기는 하고 넘어가야하는 주권국가의 체면이다. 그동안 정부 정당 재계등 각계에서 숱한 사람들이 소련을 다녀왔다고 자랑삼아 얘기했지만 그사람들이 거기가서 대한항공 여객기 피격사건을 한번이라도 떠올려보았다는 얘기는 들은적이 없다.
이미 영사관계까지 수립되고 연내수교 전망까지 거론되는 상황에서 우리가 소련에 당했던 억울한 일은 짚고 넘어가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도 끔찍하고 어이없이 당한 일이라 기억을 되살리기도 싫지만, 83년9월1일 새벽 일본북해도 북쪽,근해 상공을 날고있던 KAL점보여객기가 소련 전투기 미그23의 미사일 기습을 받아 탑승자 2백69명 전원이 몰사했던 것이다. 한국은 물론 미ㆍ일등 세계각국에서 「용서받지 못할 만행」이라고 흥분했지만 당시 소련은 오가르코프 군참모총장이 회견을 통해 『KAL기가 첩보비행을 했기때문』이라고 엉뚱하게 뒤집어 씌웠다. 사건 한달뒤 안드로포프 공산당서기장은 「유감」이라는 한마디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당시 우리정부가 취했던 조치는 공개사죄와 피해보상을 요구한 전두환 전대통령의 특별담화발표가 전부였고 소련측은 이를 침묵으로 묵살했던 것이다.
소련정보부인 KGB의 주요요원으로 10년전 미국에 망명한 빅터ㆍ세이모프는 지난 2일 워싱턴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79년 교황암살을 지시한 것은 안드로포프였으며 KAL기 격추역시 안드로포프의 승인없이는 절대로 이뤄질수 없는 일이라고 폭로하면서 파키스탄 지아대통령 폭사 역시 KGB의 비밀공작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폭로에도 불구하고 소련을 방문하는 한국 고위인사들이 앞으로도 이 사건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냥 돌아온다면 원망을 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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