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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만에 다시 발견된 북한의 「제4땅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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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만에 다시 발견된 북한의 「제4땅굴」

입력
1990.03.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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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뿐이던 「추가 땅굴」 현실로… 또 충격/동부전선선 처음 확인… 더 많을지도/굴착시기 관심… 최근이면 「대화」 영향/정부,긴장불씨ㆍ북 자극줄까 고민 한때 묵인 고려도제3땅굴이 발견된지 12년만에 다시 발견된 북한의 제4땅굴은 이미 발견된 3개의 땅굴외에 20여개의 땅굴이 더 있을 것으로 분석해온 군당국의 추정이 현실로 드러났다는 점에서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군당국은 그동안 귀순자들의 증언과 인공위성을 통한 미국의 첩보등 각종 정보를 종합분석한 결과 최소한 20여개의 땅굴이 전 전선에 걸쳐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해왔었다. 정부는 이같은 분석을 토대로 최신 탐사장비등을 도입,가장 유력한 후보지 7∼8개소에서 시추작업등을 포함한 탐사작업을 벌여왔었다.

정부는 지난해 12월24일 시추작업을 통해 땅굴의 징후를 알아냈다.

그러나 역갱도를 파서 눈으로 실체를 확신하기 전까지는 비밀에 부쳐야 한다는 원칙에서 발표를 미뤄왔다.

제4호 땅굴은 또 그동안 3개의 땅굴이 중서부 전선에서 발견된 것과 달리 동부전선 산악지역에서 확인됨으로써 북한이 더 많은 땅굴을 파놓았을지 모른다는 우려를 더욱 짙게 해주고 있다.

군당국의 종합적인 분석이 있어야겠지만 우선 관심으로 떠오르는 것은 4호 땅굴이 언제 파졌냐는 시점의 문제이다.

4호 땅굴의 굴착시기는 북한의 전략ㆍ전술 변화를 알게 해주는 것은 물론 최근 활발히 추진되고 있는 남북대화ㆍ북방외교에 큰 변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군당국은 현재까지 1,2,3땅굴과 거의 같은 시기인 70년대 초반에 4호 땅굴이 굴착된 것이 뒤늦게 발견된게 아닌가 보고 있다. 그것은 부근 지형의 변화,땅굴속 토양의 정밀분석,굴착기술,유류품을 통해 분석되어지는데 다소 시일이 걸린다는게 군당국의 말이다.

분석 결과 4호 땅굴이 80년대이후에 파진 것으로 확인된다면 남북대화에 엄청난 걸림돌로 등장할 것이 틀림없다. 팀스피리트훈련을 북침군사연습으로 규정,남북대화 중단의 빌미로 이용하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당장 국제여론의 공격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이는 북한이 동유럽의 변혁을 시발로 전개되는 신데탕트 물결을 외면하기 어려운 대내외적 요인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들의 개방노력에 큰 부담을 지울 것이다.

한국정부로서는 4호 땅굴의 발견이 현재 진행중인 남북대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한 이상 나름대로의 고민을 안게 됐다. 4호땅굴이 새로운 긴장의 불씨가 될 뿐 아니라 외교적으로 수세에 처하게 되는 북한당국을 자극하면 남북대화의 통로가 완전히 차단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 일각에서는 발견사실 자체를 당분간 묻어두자는 의견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연초부터 증권가에서 땅굴 소문이 나돌고 일부 외신에 보도되면서 세계일보 파문으로까지 비약되자 정부는 사실을 확인,발표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됐다.

정부는 이날 이례적으로 내외신 보도진을 땅굴현장에 불러 직접 육안으로 최종 관통작업을 확인하게 했다.

정부가 땅굴 발표에 조심스러웠던 또다른 이유는 사전에 공개될 경우 북한의 무력적 대응이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2호 땅굴 발견시 북측이 역갱도 굴착을 눈치채고 갱내에 부비트랩을 설치,관통 마무리작업을 하던 병사 8명이 폭사하는 사고가 있었다.

또 자연동굴로 판명될 경우 기왕의 3개 땅굴마저도 우리측의 조작으로 북한측에 의해 선전될 수 있다는 우려도 깔려 있었다.

전략적 측면에서 볼때 땅굴은 현대전에서 시대착오적인 원시적 방법으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한국 지형의 특성으로 인한 한국전의 독특한 양상을 고려하면 가장 효과적인 기습도발의 도구라는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그것은 바로 고도의 무기체계와 총체적인 현대전이 간과하기 쉬운 허점을 역이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일성은 지난 71년 『하나의 땅굴은 10개의 핵폭탄보다 효과적이며 요새화된 현 전선을 극복하는 최적의 수단』이라며 땅굴의 전술적 가치를 강조한 바 있다.

전략가들에 의하면 이른바 「기습승수」로 불리는 이같은 전술적 효과는 적의 70% 전략지수만으로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군당국은 이번 땅굴의 발견으로 전략ㆍ전술을 일부 수정해야 하는 부담을 갖게 됐으며 정부로서도 과거와 달리 반공이데올로기의 실례로서만 떠들 수 없는 미묘한 입장에 처하게 됐다.

이같은 이유에서 정부의 땅굴발표에 따른 북한측의 대응이 우선 크게 주목되고 있다.【윤승용기자】

◎74년 첫 발견… 3호는 서울과 44㎞/모두 DMZ내에 위치… 취침ㆍ배수 시설도/2ㆍ3호 높이 2m… 중화기 운반까지 가능/땅굴 약사

지금까지 북한의 땅굴이 발견된 것은 74ㆍ75ㆍ78년 등 3차례이다.

1호 땅굴이 발견된 것은 지난 74년 11월15일. 주한유엔군사령부는 이날 상오 중서부전선 비무장지대 남쪽 한계선 남쪽 1㎞ 지점인 고랑포 동북쪽 8㎞ 지점 부근에서 순찰중이던 민정경찰대가 지하에서 수증기가 올라오는 것을 발견,파보니 지하 46㎝ 지점에서 콘크리트 땅굴을 찾아냈다고 발표했다.

이 땅굴은 비무장지대안 북서쪽에서 동남쪽 방향으로 뚫려 있었고 폭 90㎝,높이 1백20㎝ 규모의 조립식 콘크리트로 되어 있었다. 땅굴안에는 2백20볼트 전선에 60W짜리 전등이 달려 있었고 협궤가 놓여 있었다. 또 사람들이 잠을 잘 수 있는 장소와 배수시설도 갖춰졌는데 크레모어 지뢰와 수레차,음식이 담긴 밥그릇,시계 등이 발견돼 발각 직전까지 공사가 진행됐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당시 군당국은 이 땅굴을 통해 시간당 7천2백여명의 병력이 통과할 수 있다며 북한이 기습전과 간첩파견등을 위해 판 것이라고 밝혔었다. 땅굴을 발견한 닷새뒤인 20일에는 땅굴안에서 조사작업을 벌이던 중 북한이 매설한 폭발물이 터져 국군과 미군장교 2명이 숨지고 미군 5명과 국군 1명등 사병 6명이 부상을 입었다. 26일 열린 군사정전위 회의에서 유엔군측은 북한측에 땅굴을 공동조사할 것을 요구했으나 북한측은 한미 양국군의 조작이라며 거부했다.

2호 땅굴이 발견된 것은 약 넉달뒤인 75년 3월24일 철원 동북쪽 13㎞ 지점에서였다. 73년말께부터 북한의 땅굴굴착을 낌새 챈 국군이 착정기와 고성능 지하촬영카메라를 동원해 굴착지점을 발견,차단 터널을 뚫다가 24일 확인한 것이다. 땅굴안을 확인한 결과,콤프레서 냉각에 이용한 듯 중간지점에 폭 1.5m 정도의 웅덩이가 발견됐다.

2호 땅굴은 1호 땅굴과 여러 면에서 비교가 됐다. 1호 땅굴이 지하 46㎝ 지점에 설치된데 비해 2호 땅굴은 산밑 50∼1백60m 지점의 화강암 지역을 굴착한 것이었다. 이 땅굴은 높이와 폭이 2m 가량씩이나 돼 야포와 차량등도 통과할 수 있는 규모였다. 총 길이는 3.5㎞로 1호 땅굴과 비슷했으며 군사분계선을 넘어 우리쪽으로 1.1㎞나 파고 들어왔다.

2호 땅굴 발견뒤인 4월7일 조사 작업중이던 국군사병 8명이 북한군이 설치한 부비트랩이 폭발하는 바람에 숨졌다.

길이 1.6㎞의 3호 땅굴이 발견된 것은 78년 10월17일. 국군은 74년 귀순한 북한군 김부성씨가 판문점 서남쪽 4km 지점에서 땅굴굴착기사로 일해왔다며 3호 땅굴 사실을 제보해와 탐사작업을 벌였으나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6월10일 국군의 탐사공중 한 곳에서 지하폭발이 일어나 파이프가 튕겨나오고 물이 치솟아 증거를 포착하게 된 것. 이후 국군이 지하 70m까지 내려가며 차단땅굴을 2백80m쯤 뚫고 들어가자 북한의 3호 땅굴과 마주쳤다.

3호 땅굴도 2호 땅굴과 마찬가지로 구릉지대의 지하 70m이상의 깊숙한 곳으로 파들어왔다. 규모도 높이 1.8∼2m,폭 2m정도로 선 채로 충분히 이동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중화기의 운반도 가능한 상태였다.

이 땅굴은 발견된 3개의 땅굴중 가장 서쪽에 있으며 서울과 불과 44㎞ 거리였다. 군당국은 3호 땅굴은 73년과 74년에 1,2땅굴이 발견됨에 따라 일시 중단했던 굴착작업을 재개한 곳으로 보고 이밖에도 여러 개의 땅굴이 더 있을 것으로 예상해왔다.【원인성기자】

◇1,2,3,4호 땅굴 비교

●1호

〈1〉발견일시 : 74년 11월15일

〈2〉위 치 : 고랑포 동북쪽 8㎞

〈3〉깊 이 : 지하 46㎝

〈4〉길 이 : 3.5㎞

〈5〉크 기 : 높이 1.2 폭 0.9m

〈6〉침투길이 : 1㎞

〈7〉구 조 : 콘크리트 슬래브

〈8〉기습방향 : →고랑포→의정부→서울(65㎞)

●2호

〈1〉발견일시 : 75년 3월24일

〈2〉위 치 : 철원 동북쪽 13㎞

〈3〉깊 이 : 지하 50∼160m

〈4〉길 이 : 3.5㎞

〈5〉크 기 : 높이 2 폭 2m

〈6〉침투길이 : 1ㆍ1㎞

〈7〉구 조 : 화강암층 굴착

〈8〉기습방향 : →철원→포천→서울(101㎞)

●3호

〈1〉발견일시 : 78년 10월17일

〈2〉위 치 : 판문점 남쪽 4㎞

〈3〉깊 이 : 지하 73m

〈4〉길 이 : 1.6㎞

〈5〉크 기 : 높이 2 폭 2m

〈6〉침투길이 : 435m

〈7〉구 조 : 화강암층 굴착

〈8〉기습방향 : →문산→서울(44㎞)

●4호

〈1〉발견일시 : 90년 3월3일

〈2〉위 치 : 양구 동북쪽 26㎞

〈3〉깊 이 : 지하 147m

〈4〉길 이 : 2.03㎞

〈5〉크 기 : 높이 2 폭 2m

〈6〉침투길이 : 1.03㎞

〈7〉구 조 : 화강암층 굴착

〈8〉기습방향 : →서화→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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