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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영상점“텅텅”… 변두리는“풍성”/강병태특파원 격변의 소련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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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영상점“텅텅”… 변두리는“풍성”/강병태특파원 격변의 소련 르포

입력
1990.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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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필품 공급난… 묘한 이중구조/22층 특급호텔에 진공관TV… 텔렉스ㆍ팩시도 없어/서방제 퍼스컴ㆍ비디오카메라 1대 값이 10년치 월급/도심 벗어난 작은 상점들엔 생필품ㆍ철아닌 과일 가득오늘의 소련은 흔히 『정치ㆍ사회적 혁명과 경제적 공황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혼돈속에 있다』고 표현된다. 역사적 변혁의 와중에 있는 초거대국 소련의 실상을 정확히 읽어내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작업임을 일깨우는 지적이다. 특히 서방자본주의 세계로부터의 초행의 방문자에게는 그작업은 애초부터 「장님 코끼리만지기」식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소련 방문자들에게 가장 뚜렷이 새겨지는 공통된 인상은 이 공산종주국의 경제가 상상 이상으로 낙후ㆍ피폐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놀라운 발견」은 적어도 소련사회의 일상적 외양을 놓고 볼때는 큰 잘못이 없다.

경제적 낙후상은 동경 나리타(성전)공항에서 모스크바로 향하는 소련국영 아에로플로트기내에서부터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옷차림으로 미뤄봐 소련의 중류이상 계층이 분명한 신사들이 값싼 일제 산요오디오세트가 든 커다란 박스들을 기내로 끌고 들어오느라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오디오세트 뿐 아니라 비디오 카셋레코더와 퍼스널 컴퓨터도 눈에 띤다. 서방언론들이 이미 「소련의 신흥부유층」으로 명명한 바 있는 이들 소련인 서방여행자들의 모습은 60년대 월남이나 70년대 중동으로부터 귀국하는 한국인들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서방에서 20달러 정도면 살 수 있는 청바지 한벌이 모스크바시내의 협동조합(코페라치프) 상점에서는 근로자 월평균임금 2백루불의 절반이 넘는 1백20루불(공식환율로 2백달러)에 팔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 해외쇼핑열기를 이해할 수 있다. 청바지는 약과이고 1천5백달러짜리 애플퍼스널ㆍ컴퓨터나 소니 비디오ㆍ카메라는 근로자 임금의 10년치가 훨씬 넘는 4∼5만루블에 암거래된다.

4만루블이면 공정가격 8천루블인 소련제 소형승용차 라다5대를 살 수 있는 돈이다.

물론 10년 가까이 순서를 기다려야 살 수 있는 라다승용차의 암거래가격은 공정가격의 몇배나 된다. 하지만 『서방에서 비디오 카메라 한대만 사오면 갑부가 될 수 있다』는 얘기가 오늘날 소련 일반시민들 사이엔 「신화」처럼 오가고 있다.

그러나 소련인들의 「신화」에 대한 관심은 공항내부의 퇴락한 시설과 벌떼처럼 모여드는 허름한 차림의 택시운전사들을 대하면서 스러진다.

그리고 14년이나 굴렸다는 국영인투리스트여행사의 「최고급」 볼가택시를 타고 모스크바시내로 들어가는 동안 벌써 경제적 피폐상은 실감된다. 곳곳에 구덩이가 패인 아스팔트 도로와 낡아빠진 건물들이 음침한 날씨와 겹쳐 방문자의 마음을 어둡게 한다.

인투리스트여행사가 관리하는 특급호텔 벨그라드는 소련경제가 70년대초 이래 「정체시대」에 있었다는 고르바초프의 규정을 대변하는 듯한 모습이다. 69년 22층짜리 쌍둥이빌딩으로 지어진 이 호텔은 로비의 대리석장식 등 개관초기만 해도 「특급」칭호가 부끄럽지 않았음직하다.

그러나 그동안 제대로 시설개체를 하지 못한듯 이제는 시골의 유스호스텔처럼 허름하다.

호텔방안은 듣던대로 소련의 심각한 소비재 부족을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었다. TV는 이미 오래전 서방국가에서는 사라진 진공관식이어서 스위치를 켜고 한참이나 지나서야 소리가 나온다. 욕실에는 수건2장과 빨랫비누 비슷한 비누조각만이 달랑 놓여있다. 화장지 또한 뻣뻣해 쓸 수 없을 정도다.

호텔식당의 빈약한 메뉴는 식료품공급 부족을 그대로 드러낸다. 수십가지 메뉴중 겨우 몇가지만이 실제로 제공된다. 특히 겨울철이어선지 야채는 양배추 한가지 뿐이다. 호텔에는 팩시밀리서비스는 물론 텔렉스설비도 없었다. 기사송고를 위해 여러군데를 수소문한 끝에 중앙전화국과 미국 옥시덴탈석유회장이 지은 메즈두나로드나야호텔에만 상업용 팩시밀리 시설이 있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나 며칠뒤 팩시밀리 송고에 필요한 복사용지가 떨어져 호텔은 물론,시내서점 백화점 등 여러곳을 뒤졌으나 끝내 신문용지 비슷한 누런종이 밖에 얻을 수 없었다.

소비재 부족현상은 현재 소련경제의 위기상황을 대표하는 것으로 흔히 지적된다. 실제로는 모스크바 최대의 백화점인 국영 굼(GUM)백화점에는 조악한 품질의 의류 신발 토산품 등만이 있을 뿐 치약 비누 등 생필품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호텔과 국영상점 등에서 발견되는 소비재 부족현상만으로 소련사회의 생활상을 단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국영상점에 아무것도 없지만,소련인들의 집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는 소련인 자신들의 얘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자가 찾은 페트로브스크 대로근처의 한 백화점에는,치약ㆍ칫솔ㆍ비누ㆍ세제ㆍ스타킹 등 각종 생필품은 물론,사과ㆍ포도ㆍ수박ㆍ오렌지ㆍ귤ㆍ버찌 등 온갖 과일들이 쌓여 있었다. 이곳에는 타슈켄트의 한인들이 공급한다는 마늘절임ㆍ고추절임 등도 있었다.

이곳 뿐만 아니라 중심가를 벗어난 지역의 작은 상점들에는 각종 육류와 계란ㆍ버터ㆍ생선 등이 비교적 제대로 구비돼 있었다.

값도 쇠고기 1㎏에 3루블45코페이카(한화 약 3천8백원)ㆍ계란 10개에 1루블(약 1천1백원) 등으로 크게 비싸지 않았다. 서방언론에 흔히 등장하는 텅빈 식료품점 사진은 중심지의 국영상점중에서 애써 재고가 없는 곳을 찾아내 찍은 것 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소련의 생필품공급 부족이 심각한 것은 사실이다. 또 품질이나 포장이 서방사회와 비교가 안되게 조악한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시장경제의 초기 시험단계에 있는 소련의 현실을 시장경제사회의 척도로 일거에 재단하는 것은 현실파악에 무리가 따른다.

외화소지한도 1백달러인 소련인 해외여행자들이 서방전자제품을 무더기로 사오는 현상,냉장고가 텅빈국영식료품점과 철아닌 과일과 생필품이 가득한 변두리백화점이 공존하는 소련사회를 이해하는 데는 좀 더 세밀하고 끈질긴 관찰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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