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에 묻힌 형극길 독립운동 반평생/45년 뒤늦게 「의거」 인정/북한잔류 이유 줄곧 외면 당해/3ㆍ1 운동당시 만세시위등 주도/중국피난지서 붙잡혀 숱한 고문/아들이 가까스로 자료 찾아… 대신 수상남북분단은 독립유공자의 명예도 실종되게 했었다. 광복 45년만에야 독립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추가로 포상되는 20명중에는 이북거주자,납북자라는 이유로 외면 당해온 선열들이 많다.
3ㆍ1절 71주년을 맞아 1일 상오10시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건국훈장국민장을 아버지대신 받게된 지명철씨(68ㆍ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360의194)도 선친 지석용씨(1881∼?)가 이북거주자라는 이유때문에 45년을 기다려야 했다.
평남 대동군에서 3ㆍ1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선친의 명예를 기리기위해 지씨는 방법을 수소문하다가 지난 76년12월 원호처의 「독립유공자포상신청안내」 신문광고를 보고 포상을 신청했다. 신청기한인이 77년 3월20일까지 50년도 넘은 선친의 공적내용을 입증할 자료를 갖추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부인 박순실씨(66)와 함께 자료가 있을 만한곳을 다뒤진 지씨는 충주법원에서 35년의 재판기록을 찾아냈고 동아일보 34년 1월21일자,35년 5월28일자에서 선친의 기사를 찾아냈다.
그러나 원호처는 「보충자료가 더 필요하다」 「사망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고 통보해왔다. 지씨가 알아본 결과,실제 탈락사유는 「월남하지 않았고 최근 행적도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지씨의 선친은 38세이던 1919년당시 고향 평남 대동군 김제면에 합성학교를 설립하고 완장교회전도사로 일하다가 그해 3월4일 김제면 완장리 사천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를 주도했다.
또 인근 「모락장」에서 시위에 참여하려다 주재소에 연행된 사람들을 구출하기위해 수천명의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에 쳐들어갔다. 헌병들이 총을 발포,사상자가 발생하자 시위군중은 주재소장과 보조원을 살해해 버렸다.
선친은 만주의 길림성으로 가족과 함께 피신,길림성에 교회를 세우고 동포들이 많은 길림성 등 만주 동삼성일대에서 선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했으나 공소시효만료를 3개월 정도 앞둔 33년12월 만주 무순에서 검거돼 이듬해 6월10일 법원에서 살인미수혐의로 징역10년을 선고받고 8년 복역한끝에 42년3월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마포형무소에서 모진고문을 당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반불구자가 됐고 가세도 기울었다.
지씨가 지난 48년 몸도 제대로 가누지못하는 선친을 떠나 월남할때 선친은 『뒤따라 갈테니 먼저 내려가 자리를 잡으라』고 반강제로 자신을 떠나보냈다.
그러나 38선왕래가 끊기더니 급기야 6ㆍ25마저 터져 재회의 약속은 영영지켜지지 않았다.
6ㆍ25때부터 경남 진해 해군공창 군무원으로 10여년간 근무한 지씨는 부인 박씨가 피아노학원을 하며 맞벌이로 생활을 거들었으나 1남4녀의 학비조차 대기힘들었다.
최근 북한에 다녀온 재미동포친척은 선친의 형제중 한분이 6ㆍ25직후 총살됐으며 선친은 북한당국의 협력제의를 거부하다 행방불명됐다고 알려왔다.
지씨가 받는 훈장은 건국훈장 건국포장 대통령장 등 독립유공자에게 주어지는 훈장중 훈격이 가장 높아 매달 35만4천원의 유족보상금이 지급되고 자녀와 손자세대도 대학졸업까지의 등록금이 전액면제된다.
지씨는 『선친의 경우처럼 본의아니게 북한에 남은 분이나 후손이 없어 공로가 사장되는 독립운동가들을 더늦기전에 빠짐없이 발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김경철기자>김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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