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새로운 한반도정책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것 같다. 「새로운 한반도정책」이라곤 하지만,엄밀하게 말하자면 고르바초프체제가 구상하고 있는 한반도정책이라는 뜻에서는 굳이 새로운 정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재작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해서 급진전돼온 모스크바의 서울접근정책은 그동안 정치를 따로 떼어서 비정치적 교류에 국한된 것이었다. 물론 비공식적으로는 정식국교 수립을 기회있을 때마다 시사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0일 셰바르드나제외무장관이 「한반도의 장벽」을 허물라고 언급한 데서도 나타난 것처럼 소련은 「평양 지지」의 공식노선을 고집해왔다.
그러나 최근 소련은 이러한 정치적 노선을 수정하는 듯한 움직임을 드러내고 있다. 역시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세계경제 및 국제문제연구소(IMEMO)의 한ㆍ일 정치문제연구부장은 지난 11일 소련ㆍ북한의 동맹관계는 변질됐으며,한국과의 국교수립은 「시간문제」라는 발언을 했다.
영사처 개설에 이어 소련은 서울모스크바 항공노선을 열기로 합의했고,무역진흥공사를 통해서 군수공장의 민수공장화사업에 한국기업의 참여를 요청해왔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소련 외무부의 대변인 게라시모프가 정식국교관계를 맺기 이전에 한국과 소련의 외무장관회담이 가능할 것이라고 시사한 것이다(한국일보 21일자 1면 보도). 비록 당기관지 프라우다나 정부기관지 이즈베스티야는 아니지만,관영 주간신문 모스크바ㆍ뉴스가 김일성을 가리켜 「인민을 학살한 독재자」로 비난한 북한의 전직 고관의 글을 전재했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들은 모두 지난 10일 끝난 미ㆍ소 외무장관회담이 있은 뒤에 나타난 사실들이다. 특히 소련이 한ㆍ소 외무장관회담의 가능성을 외무부 대변인이 시인했다는 것은 소련정부가 정경분리원칙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소련이 북한과의 동맹관계를 아예 포기하리라고 기대한다면 어리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소련은 유럽에서 보수적인 교조주의 정권을 밀어내는 데 힘을 보탰지만,동독에 대한 「기득권」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소련은 한반도에 대해서도 미국과의 협상에 의한 군사적 대결태세의 완화와,그 테두리 안에서 한국과의 다각적인 관계수립을 밀고 나갈 의도를 분명히하고 있다. 그렇다고 북한과의 동맹이라는 일종의 「기득권」을 포기하리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동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한반도에서의 「탈냉전체제」를 위해서는 더이상 평양의 교조주의에 얽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시계바늘은 김일성과는 반대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모스크바의 정치적 스케줄을 우리로서는 구체적으로 짐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ㆍ소관계가 공식국교관계로까지 발전하는 것은 그리 먼 앞날의 일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우리에게 창의적 선택의 기회와 함께,지혜로운 현실판단의 부담을 지는 대비태세가 필요하다.
소련을 포함하는 동유럽과의 교류관계를 한반도의 긴장완화로 연결시켜,궁극적으로 통일에까지 밀고 나가는 길을 찾는 것이 앞으로 우리가 해내야 될 일의 핵심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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