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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내각」 청와대 비서실/역대의 기능과 인맥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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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0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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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ㆍ권한 6공들어 가장 축소/3공 대통령 견제속 경호실과 「정점」 경쟁/5공 초기엔 실세 「3허」 포진 영향력 배가/참모기능 없던 1공 땐 「이 대통령 행랑채」 혹평도/역대 비서실장청와대비서실은 「권부」니 「소내각」으로 불려진다. 청와대비서실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대통령이 비서실을 통해 국정운영의 가닥을 잡아가고 대통령의 국정운영 스타일이 비서실의 운영과 관장형태에서 직ㆍ간접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 비서실장이나 수석비서관 등은 행정부의 국무위원들보다 훨씬 자주 대통령을 측근에서 보좌할 수 있는 데다 대통령의 의중을 재빨리 간파할 수 있는 지척에 있다. 따라서 청와대비서실이 조직적으로 운영되면서 인의 장막을 펼칠 경우 국정은 비서실 차원에서 얼마든지 좌우될 수 있으며 청와대비서실은 한때 그러했던 전력을 갖고 있다. 청와대비서실은 또 입법ㆍ사법ㆍ행정과 관련한 모든 보좌기구를 갖고 있다. 여기에 공직자의 기강 등을 감독ㆍ지도하는 사정기능과 공직자 임ㆍ면에 필요한 스크린기능까지 갖고 있어 그 권한의 심대함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청와대비서실은 이런 의미에서 1공에서부터 지금의 6공에 이르기까지 적지않은 조직과 권한의 변천을 거듭했지만 「권부」로서 존재를 과시하는 데는 조금의 지장도 없었다. 역대 청와대비서실의 기능과 구성인맥의 조명을 통해 「청와대비서실」을 알아본다.

역대 공화국중 청와대비서실의 규모가 가장 컸던 때는 3공화국 박정희대통령 시절이었다. 18년간 절대 통치자로 군림했던 박대통령은 내각과 달리 청와대 비서실이 「소행정부」의 역할을 담당하게 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당시 청와대에는 9명의 수석비서관이 있는 비서실과,9명의 특별보좌관이 있는 특보실이 박대통령을 보좌했다. 또 경호실도 비서실과 어깨를 겨루거나 오히려 능가하는 「힘」을 보유토록 허용했다.

5공화국 시절의 전두환대통령은 절대 권위를 누렸던 만큼 당시의 청와대비서실도 상당한 권한을 갖고 있었지만 비서실 구성원은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6공화국 청와대비서실은 권위와 영향력은 물론 행정부 장악능력이 5공보다 훨씬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5공 당시 비서실은 의전ㆍ정무Ⅰㆍ정무Ⅱㆍ경제ㆍ공보ㆍ민정ㆍ교육문화ㆍ사정ㆍ법무ㆍ총무의 10개 비서관실 형태가 대체적으로 유지됐다.

6공은 정무ㆍ행정ㆍ경제ㆍ민정ㆍ의전ㆍ공보ㆍ총무ㆍ외교안보ㆍ사회담당보좌역 등 9개 부서와 비서실과는 별도로 정치담당특보제를 두고 있다. 똑같이 10개 부서인 셈이다.

그러나 기능과 역할면에서도 현재의 비서실은 그 이전보다 현격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지금의 청와대비서실이 가장 충실한 비서실 본연의 보좌 및 참모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6공화국

현재의 청와대비서실은 5공 때와 달리 조직으로서는 탄탄한 짜임새를 갖추고는 있으나 대외적 권위와 대행정부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는 박정희대통령의 3공화국 시절과는 비교가 안되며 전두환대통령의 5공화국 시절보다도 약화되어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노대통령의 권위주의 불식이라는 당초 의도가 그대로 적중된 셈이기는 하지만 효율적 통치기구의 보좌라는 의미에서는 다소의 부정적 시각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우선 6공의 비서진은 연성의 분위기를 갖고 있다. 홍성철비서실장,노재봉정치특보,최창윤정무,이연택행정,문희갑경제,정구영민정,노창희의전,이수정공보,김종휘외교ㆍ안보,김학준사회보좌역,임재길총무 중에서 강성으로 비쳐질 인사는 정치와 무관한 분야의 1∼2명뿐이다.

6공의 비서진은 유사시 대통령의 참모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발휘하지만,창의력을 갖춘 「사전참모」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게 여권의 대체적인 견해이다. 업무에서 능동적 자세가 결여돼 있다는 지적이다. 이를 두고 노대통령의 통치스타일에 연유한다는 분석도 있다.

노대통령은 실제로 전임자들처럼 아랫사람들,특히 비서관들에게 일일이 인정감을 주지 않는 독특한 관행을 갖고 있다. 인정감이 없을 경우 충성도는 약해지게 마련이다.

또 하나는 6공의 대통령권한 약화와 여소야대정국의 장기지속으로 청와대 자체의 권위가 필요 이상으로 하락됐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 때문에 비서진들의 의욕이 과거정권 때와 달리 상실됐다는 지적이 많다. 이밖에도 청와대비서실 밖의 인사가 노대통령의 정책결정을 적지않게 보좌해 비서실의 창의성과 의욕을 저하시키고 있다는 흥미로운 풀이도 있다.

○5공화국

5공의 비서실은 대통령의 보좌ㆍ참모 및 행정조정기능은 물론 상당부분은 행정부를 장악하고 지휘하는 기능까지 겸비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정치분석가들은 5공의 출범성격상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한 권위주의 방식의 통치가 초기부터 불가피했던 점으로 미루어 비서실의 기능과 역할이 이의 연장선상에서 강화됐던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5공의 청와대비서실은 그러나 점차로 시간이 지날수록 대행정부의 기능과 역할이 축소지향화해가는 양상을 띠어갔다. 초창기에는 이른바 개혁주도세력으로 불리는 「3허」가 비서실에 실세로 포진,비서실의 힘을 배가시켰다.

5공출범 초기 대통령보좌관으로 있다가 정무수석으로 자리를 옮긴 허화평씨,사정수석 허삼수씨는 5공탄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핵심실세였다.

5공시절 청와대비서실의 흐름은 비서실장의 면면을 살피면 더욱 선명하게 파악된다. 기묘하게도 전대통령의 통치권위가 비서실장의 비서실내 영향력과 반비례했던 것으로 비쳐지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5공의 초기비서실장은 김경원씨이며,뒤이어 이범석씨(버마 아웅산에서 작고) 함병춘씨(〃) 강경식씨 이규호씨 박영수씨가 바통을 잇고,말기에 김윤환 현민자당의원이 맡아 6공출범의 가교역할을 담당했다. 7명의 비서실장중 정치적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는 마지막 김실장이 가장 우위에 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반대로 전대통령의 권위는 레임덕현상으로 가장 떨어진 때였다.

5공시절 의전수석비서관은 김병훈씨가 혼자 맡았다. 정무1은 우병규­허화평­정순덕­허문도­김윤환­이진우씨가,정무2는 김창식­김태호­안응모­유흥수­김용래­강우혁씨가 맡았다.

경제수석은 김재익(아웅산서 작고)­사공일­박영철씨가,공보수석은 이웅희­황선필­정구호­이종률­최재욱씨가,민정수석은 이학봉­김용갑씨가 각각 맡았다.

교육문화수석은 이상주­손제석­신극범씨가,사정수석은 허삼수­정관용­김종건­이양우씨가,85년 중반기에 신설된 법무수석은 이중근씨가 맡았다. 총무수석은 전석영­이재식씨가 맡았다.

5공시절 초반에는 강성인사들이 많았다가 후반기에 갈수록 이들 인사들이 퇴조하는 양상을 나태내는 것도 한가지 특징이다. 예를 들어 6공과의 정권교체 직전인 88년초 수석비서관 10명중 군출신인사는 김용갑민정수석 1명뿐이었다.

○3공화국

청와대비서실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갖추고 역할과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제3공화국 박정희대통령 때부터였다. 박대통령이 절대권력자였던 것처럼 청와대(비서실보다는 경호실)도 절대적 권한을 향유했다.

박대통령은 유신 전까지의 3공화국과 유신 이후의 4공화국 등 2기의 집권기간 내내 절묘한 권력의 배분과 적절한 견제와 균형의 인사로 언제나 청와대가 권력의 정점이 되도록 했다.

3ㆍ4공화국에서는 청와대비서실보다는 경호실 또는 중앙정보부와 공화당이 정치적 영향력에 있어서 교대로 우위를 점했으나 박대통령이 18년간 절대적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바탕은 엘리트참모로 구성된 비서실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3ㆍ4공화국의 비서실장은 이후락­김정렴­김계원씨이다. 의전수석은 조상호­최광수씨이며,정무수석은 민충식­서봉균­김학렬­조시형­김학열­김상복­홍성철­유혁인씨이다. 제4공화국에서 신설된 정무Ⅱ는 정상천­고건씨이며,경제Ⅰ은 김학렬­정소영­김용환­이경식­이희일 1서석준씨이고,경제Ⅱ는 신동식­오원철씨이다. 경제Ⅲ은 장덕진­김용환­양윤세씨의 차례이다.

공보는 박상길­신범식­강상욱­윤주영­김성진­임방현씨이며,민원은 이낙선­고재일­유승원­안광석­김시진­박승규씨이고,정보는 권영민­권상하­유승원­김시진씨로 비설시내의 민원과 정보분야가 분리ㆍ통합하고 있다. 총무는 고재일­안광석­김원희­임대지­홍승완­전석영씨 등이다.

○1ㆍ2공화국

가부장적인 권위로서 제1공화국을 이끈 이승만대통령 시절의 경무대비서실은 오늘날의 비서실과는 달리 참모ㆍ보좌기구라기보다는 단순한 비서역할에 머물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때문인지 경무대비서실은 이대통령의 「행랑채」였다는 혹평을 듣고 있다.

경무대는 48년 8월 정부수립과 동시에 생겼고,약 12년 뒤 4ㆍ19학생의거 후 민주당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름이 청와대로 개칭됐다. 1공화국의 경무대비서실장은 이기붕­고재봉씨로 기록되어 있다.

제2공화국 의원내각제의 민주당 정권하에서 윤보선대통령은 상징적인 국가원수에 머물러,청와대비서실은 유명무실했다. 제2공화국의 청와대비서실장은 이재항­이동원씨였다.

4공화국과 5공화국 사이의 과도기인 최규하대통령 시절의 비서실장은 4공의 의전수석이었던 최광수씨가 맡았으나 과도기였던 만큼 비서실의 기능은 미미했다는 지적이다.<이종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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