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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말/김용구 논설위원(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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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말/김용구 논설위원(메아리)

입력
1990.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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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동란의 휴전이 성립되어 사람들은 상흔을 씻고 재기의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내가 서울 중학동 언덕위의 낡은 2층건물을 찾은 건 1954년 6월 초였다. 건물 안에서는 날씨도 날씨지만 무엇인가 열기를 느끼게 했다.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의 걸음이 빨랐고 그들의 얼굴은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거기는 한국일보 창간 며칠전의 현장이었다. 난생처음 이런 분위기를 접하며 속으로 흥분을 느꼈지만,겉으론 평정을 지켰다.나이는 25세였지만,시대의 격랑을 겪을대로 겪었다. 신학을 공부한 배경으로 유엔군에 종군,인천상륙작전,함북 이원상륙,북청ㆍ갑산을 거쳐 혜산진으로 진출하다가 중공군 참전으로 함흥ㆍ흥남에서 후퇴했다. 다시 농촌인력을 투입,간선군사도로 건설을 돕다가 유엔군 한국부흥단 연구부에서 일했었다.

나는 인생의 기로에 있었다. 신문사에서 필요 절차를 밟고 다음날부터 기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경력이 경력이라 나의 부서는 코리아 타임스였다. 그때 우리 사회는 새 출발의 몸부림을 하고 있었고,언론계는 전문적 조직의 초창기를 맞고 있었다. 나는 관훈클럽창립에 동참했고 편집인협회에도 드나들면서 언론계의 원로ㆍ중진과 알게됐다. 이관구 오종식 홍종인 선생들의 지도를 받게된 건 이 무렵부터요,또 뒤에는 유광열 고재욱 유봉영 선생들의 훈도를 받게 됐다. 신문사의 소속을 넘어서 전문단체 활동이 가져다준 특전이었다.

이승만 정권 말기에 <여적> 사건이 일어났다. 급기야 경향신문이 문을 닫자 도하의 신문편집인들이 항의성명을 냈다. 이 사태를 토의하는 편협임시총회는 보도자유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때 <보도자유> 란 새 어휘가 탄생했는데,이것은 영미사회의 Freedom of information이란 개념을 처음 도입한 것이었다. 이후 보도자유위는 언론계의 핵심모임이 된다. 신문윤리위원회의 창설,신문연구소의 구상이 여기서 짜여졌고,밖으로는 유엔에 보내는 첫 <한국언론 자유보고> 가 여기서 작성됐다. 또 <신문윤리강령> 이 채택 4년만에 꼭 한번 수정됐는데 그것은 이후 중대한 구실을 하게된 개념을 수용한 것. 즉,오늘날도 불가결의 언론무기가 돼있는 <알 권리> 개념이 이 때 뿌리를 박았다.

내가 한국일보 논설위원실로 자리를 옮긴건 1963년 봄이었다. 우리글이 서툴면서 논설위원이 되었으니 나는 초학자가 되어 논설쓰기를 배웠다. 여러 원로ㆍ선배가 스승이 됐다. 그 무렵만 해도 사설란은 한자에다 한글토를 다는 정도로 한자로 새까맣다. 후발 논설위원으로 나는 첫 논설부터 순 한글로 써서 그대로 나갔다. 그리하여 내가 쓰는 날 사설란의 두 사설은 거의 흑백으로 나뉘었다. 독자의 어리둥절하는 반응이 빗발쳤던가 보다. 나는 발행인에게 불려가 꾸지람을 들었다. 나는 한글사설을 고치지 않았다. 이로하여 세번째 불려갔을 때 발행인은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니 심사숙고하라 했다.이렇게 신문사설은 다른 사회적 문장에 뒤져서 한글화 되어 갔다. 꼭 20년전 이 난을 쓰게 됐는데 정치상황이 경화되고 준엄해지면서 나는 민주회복을 외치는 소리를 외면하지 못했고,그 탈로 8년 동안 타의로 붓을 꺾고 초야에 묻혀지냈다. 나는 다시 돌아와 지난 1년반 동안 이 난에서 독자를 마주하는 기쁨을 가졌다. 이제 노병으로 사라질 때가 왔다. 할말을 못다한 내 글이지만 독자의 성원에 감사하며 붓을 놓으면서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다시 가겠다고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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