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당 재집권」 위기감… 55년 “보수집합”/재계압력 등 추진력 … 미도 일조/“길어야 10년” 전망이 35년 지탱한국정계의 「보수대연합」 모델로 거론되고 있는 일본 자민당은 35년의 시차와 생성배경,연합세력간의 기존관계 등에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보수연합」이라는 현상론적 비교에서는 일단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자민당(자유민주당)은 1955년 11월 당시 집권당이던 일본 민주당의 선도로 자유당ㆍ개진당ㆍ협동당 등 보수계 정당들이 합당해 발족했다.
그러나 민주당이 전후 최초의 총선거에서부터 정권을 장악했던 자유당의 비주류 총수이던 하토야마ㆍ이치로(구산일랑)가 54년 11월 결성한 정당이란 사실을 감안하면 원래의 자유당이 둘로 갈라섰다가 재통합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통합후 자민당의 중의원 의석 2백99석중 민주당이 1백85석,자유당이 1백12석으로 두 당이 2백97석을 차지한 사실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전후 일본의 보수정치세력들은 전전의 정우회민정당의 맥을 이은 민주자유당(후에 자유당으로 개칭)으로 결집,출발했다. 45년 11월 결성된 자유당은 기본적으로 천황제의 보존을 주장하면서도 여성참정권 부여등 약간의 진보색채를 가미했으며 초대총재는 바로 하토야마였다.
패전후 잠정적으로 히가시쿠니ㆍ나루히코(최근 사망) 내각과 시데헤라(폐원) 내각을 거친 뒤 46년 4월 최초 총선에서 자유당은 중원의석 4백66석중 1백40석을 차지,제1당이 됐다. 이에따라 당연히 총재인 하토야마가 내각을 이끌게 돼 있었다. 그러나 당시 군정당국인 연합국 최고사령부(GHQ)가 하토야마의 전시이력을 문제삼아 이른바 「공직부적격」 인물로 판정함으로써 하토야마내각은 무산되고 대신 요시다ㆍ시게루(길전무)가 총재직을 맡아 요시다내각을 발족시키게 된다. 이때 요시다와 하토야마는 하토야마가 「공직추방」에서 해제되면 당권을 되돌려준다는 묵계를 맺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후 요시다가 이 약속을 깸으로써 후일 두 거물간의 숙명의 대결로 이어지게 된다.
요시다ㆍ시게루는 전후 일본정치의 기본틀을 만든 인물이지만 미 군정당국이 일본의 민주화를 위해 구 정치인ㆍ관료의 정치활동 억제,재벌 및 군부해체ㆍ토지개혁 등을 단행함에 따라 보수세력이 혼미를 거듭하고 사회주의 세력이 부상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그리고 이 결과 47년 총선에서 사회당이 제1당이 돼 당시의 민주당ㆍ국민협동당 등과 함께 가타야마ㆍ데스(편산철)를 총리로 하는 사회당 연립내각이 등장한다. 이 사회당 연립내각은 48년에는 민주당을 주축으로 하는 아시타ㆍ히토시(호전균)내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히토시내각은 사화당출신 각료 니시오ㆍ스에규로(서미말광ㆍ후일 민사당 창당)가 관련된 이른바 소화전력 의혹사건으로 붕괘돼 48년 11월 자유당이 제2차 요시다내각으로 재집권하기에 이른다.
이후 자유당은 요시다의 지도아래 정ㆍ재ㆍ관계를 망라한 파벌,이른바 「요시다학교」를 구축하며 49년 총선에서 중의원의 과반수를 확보하는등 54년까지 「요시다시대」를 구가했다.
한편 초대 자유당총재 하토야마는 50년 공직 추방에서 해제된 후 자유당 비주류로 전락했었다. 그러나 요시다내각이 장기집권의 와중에 정치헌금등 정경유착과 관련된 각종 의혹사건으로 흔들리자 54년 11월 자유당내의 반요시다파와 정진당 등 보수진영의 비주류세력을 규합,일본 민주당을 결성,대권도전에 나선다.
54년 12월 요시다내각이 총사퇴하자 하토야마는 마침내 소수 민주당내각을 구성,집권에 성공한다. 그러나 소수 민주당내각은 정국안정을 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며 특히 당시 최대의 이슈였던 자위대의 합헌성 확보를 위한 개헌을 달성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민주ㆍ자유 양당의 재통합이란 보수연합의 필요성이 강력히 제기되기 시작했다.
한편 「요시다시대」가 지속되는 동안 일본 사회당등 혁신세력은 좌ㆍ우파간등 갈등으로 분열상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사회당은 전후 결성초기 우파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으나,노동조합세력이 참여하면서 점차 좌파세력이 주도권을 확보해갔다.
그리고 양파는 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둘러싸고 분열,이른바 좌ㆍ우 양파 사회당 시대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55년 2월 총선에서 사회당을 비롯한 혁신세력이 크게 세력을 신장함에 따라 이른바 「보혁대결구도」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된다. 이 총선에서 하토야마의 집권 민주당은 1백20석에서 1백85석으로 의석을 늘렸으나 보수본류인 자유당은 1백80석에서 1백12석으로 크게 쇠퇴했다. 반면 사회당 좌파가 72석에서 89석으로 늘어나는등 사회당 좌ㆍ우파와 노동당ㆍ공산당 등 혁신세력이 전체의석 4백67석의 3분의1이상을 차지했다.
이 총선결과가 제기한 문제중 핵심적인 것은 집권민주당이 단독으로는 혁신세력의 저항을 제치고 개헌안 발의에 필요한 의회의 3분의2선을 확보하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 점이었다. 그리고 이같은 상황에서 총선에서의 세력약진에 고무된 사회당 좌ㆍ우파는 혁신진영의 대동단결을 표방,통합을 적극모색하고 나섬으로써 보수진영의 위기의식을 고조시켰다.
이렇게 되자 하토야마의 「절세참모」로 불렸던 미키ㆍ후키치(삼목무길) 민주당총무회장은 총선직후인 55년 4월 『보수통합을 위해서는 하토야마총리가 퇴진할 수도 있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음으로써 보수대연합의 신호탄을 올렸다.
집권민주당이 먼저 대권포기를 감수하면서까지 보수진영의 통합을 서두르고 나선 것은 일차적으로는 노조 등 민중운동을 기반으로한 혁신세력의 급신장과 사회당의 재집권을 우려하는 보수정계의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보수진영은 전후복구가 본격화되고 국민들의 민주의식이 고양됨에 따라 사회당등 혁신세력의 도전이 한층 거세질 것임을 재빨리 간파,기민한 대응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보수대연합의 실제적 추진력은 보수세력의 분열과 혁신세력의 단합에 위기를 느낀 재계의 압력이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재계는 54년이후 정국안정을 요구하며 보수진영에 공공연한 통합압력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통합방향을 적극 지도하고 후원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당시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미국의 역할이다. 당초 일본 민주화를 위해 보수세력을 억눌렀던 미국은 미ㆍ소간 냉전이 본격화되고 특히 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대일정책을 변경,구 정치인과 재벌을 주축으로 한 보수세력을 재등장시키는 등 친미 안정권 구축을 추진했었다. 따라서 「친미 안정정권」인 요시다정권의 붕괴와 보수진형의 혼미,그리고 혁신세력의 대두를 미국은 결코 방관할 수 없었다는 지적이다.
일본 자민당은 이렇게 해서 등장했다. 자민당 탄생의 최고 공로자인 미키ㆍ후키치는 당시 스스로 자민당의 수명을 「길어야 10년」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이후 일본정치의 보수연합세력 자민당은 「금권정치」,「정경유착」으로 대표되는 갖가지 문제를 노출,「보혁백중」과 「보혁역전」의 우려를 낳으면서도 35년간 지탱되고 있다.<동경=정훈특파원>동경=정훈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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