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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주의 언어의 서식지] 보이지 않는 도시

입력
2020.05.28 18:00
수정
2020.05.28 18:06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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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이 5·18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에서 박관현ㆍ표정두ㆍ조성만ㆍ박래전 등 4명의 열사를 호명했다. 고영권 기자
2017년 5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이 5·18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에서 박관현ㆍ표정두ㆍ조성만ㆍ박래전 등 4명의 열사를 호명했다. 고영권 기자

예고도 없이, 이야기들이 나를 찾아올 때가 있다. 그 이야기들은 내게 이렇게 말한다. 여기 보이지 않는 도시가 있어요. 이 글은 그 도시에 대한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 망월동 가자. 2016년 여름. 광주를 찾은 스승 K선생은 망월동을 찾고 싶어 했다. 5ㆍ18 국립묘지 입구의 키오스크 검색 후 선생은 한 청년의 묘역을 찾았다. 그 앞에서 선생은 묵념이 아닌 절을 올렸다. 가만 보니 눈시울이 붉어져 있다. 아시는 분이냐는 물음에 선생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이라 답한다.

서로 모르지만 두 사람의 인연은 이미 30여 년 전에 시작되었다. 1982년 10월 어느 주말. 당시 독일 유학생 K선생은 친구들과 즐거운 저녁 식사를 끝내고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수트코레아(남한)에서 한 전남대 학생이 단식 투쟁 끝에 사망했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주말의 평화는 깨지고 끝 모를 울분과 무기력함이 밀려왔다. 그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는 나는 가늠하지 못한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그 분노가 선생을 일반언어학 연구자가 아닌 사회언어학자로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30여년간 그 청년의 죽음을 마음속에 품게 했다는 것뿐이다. 그런 사연까지 들었지만 나는 그 청년의 이름을 이내 잊어버렸다.

두 번째 이야기. K선생과 5ㆍ18묘역을 찾은 이듬해의 일이다. 세상이 뒤집히긴 했나 봐요. 대통령이 5ㆍ18 기념식에 참석하는 날이 오네요.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며 나는 대통령이 호명한 전남대생을 화제로 올린다. L선생이 말을 이어 받는다. 그 친구는 재수할 때부터 봤는데 말을 참 잘했죠. 그때 대운동장에서 학생들을 모아서 설득을 하는데, 와 정말 기가 막히게 말을 잘 합디다. L선생은 계속해서 나를 1980년 5월로 데려간다. 청년 L은 학교 입구를 막고 있던 페퍼포그를 다리 밑으로 밀어 버린다. 어느새 L은 전남도청 앞에 있다. L은 시내 곳곳을 뛰어다닌다. 그때는 제가 빠르고 날쌨어요. 그래서 안 잡혔지. 느려서 잡힌 친구들은 유공자가 됐고. L선생은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L선생은 죽음의 공포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죽어 나갔어요. L은 갑자기 들이닥칠 군인들을 기다리면서 하숙집 지붕 아래에서 밤을 새운다. 23일 광주를 빠져나갔습니다. 그런데 희한하죠? 그 길에서 그 친구 이모를 만났어요. 대통령이 호명한 그분요? 네, 그 친구. 부모를 대신해서 그 친구를 찾는다고 하데요. 그 이모분 덕분에 점심도 얻어먹었어요. 그렇게 이틀 만에 고향에 도착했어요. 다들 내가 죽은 줄 알고 있더라고.

문득 나는 K선생이 찾은 청년과 대통령이 호명한 전남대생의 이름이 같다는 것을, 첫 번째 이야기와 두 번째 이야기가 연결된 것임을 알아차린다. 그 청년의 이름은 감옥에서 단식 투쟁 끝에 사망한 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이다. 그의 이름으로 이야기가 연결되는 순간, 나는 삶과 죽음, 다른 장소와 시간으로 갈려 있어도, 이 세 사람이 결국 같은 공간에 있음을 깨닫는다. 그 공간이란 일종의 ‘보이지 않는 도시’이다. 말하자면 이 세 사람은 그 도시의 시민인 셈이다. (PD 정혜윤은 세월호 유족들이 참석한 잠수사 김관홍의 장례식에서 이런 보이지 않는 도시를 보았노라고 말한다.)

이탈로 칼비노는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이미 여기 와 있는 지옥을 벗어나는 두 가지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나는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옥에서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 공간을 부여하는 것이다. 기꺼이 지옥의 일부가 되기로 한 이들은 끊임없이 부정하지만, 이 땅에는 지옥에서 지옥이 아닌 곳을 만들기로 한 사람들의 도시가 있다. 그 보이지 않는 도시의 이름은 ‘5월 광주’다.

또다시 5월이 간다. 그렇게 5월이 가도, 우리는 여전히 그 도시의 시민이다.

백승주 전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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