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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다수결로 과학이 뒤집히는 나라

입력
2020.05.13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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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방역 망친’ 이태원 코로나 감염

文 정부, 총선 뒤도 전문가 목소리 외면

정책 결정 다수 아닌 전문가 판단 따라야

이태원발 코로나19 확진자 급증 여파로 지난 11일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학 서울병원 선별진료소에서 시민들이 진담검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다. 홍인기 기자
이태원발 코로나19 확진자 급증 여파로 지난 11일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학 서울병원 선별진료소에서 시민들이 진담검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다. 홍인기 기자

유방(劉邦)은 중국 한나라의 창업자다. 그가 항우(項羽)와 쟁패할 때 위나라 무지(無知)의 추천으로 진평(陳平)을 등용했는데, 형수와의 간통 등 진평의 나쁜 행실이 드러났다. 유방이 꾸짖자, 무지가 해명했다. “제가 말씀드린 건 그의 능력이요, 왕이 탓하는 건 그의 품행입니다. 효자의 행실이 있었더라도 천하 성패를 판가름하는 마당에 그게 얼마나 이익이 되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유방은 진평에게 원래보다 높은 중책을 맡겼다.

기원전 202년 황제가 된 뒤, 유방은 신하들에게 자신의 성공 비결을 말했다. “나는 싸워서 승리하는 군략에서는 자방(子房)에 못 미친다. 국가 안녕을 도모하고 양식을 대어주는 정치력은 소하(蕭何)를 당하지 못한다.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는 전투에서는 한신(韓信)을 당하지 못한다. 다만 그들을 잘 써서 그 힘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했을 뿐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2016년 5월 15일 럿거스대 졸업식에서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를 겨냥, 이렇게 말했다. “아파서 병원에 가면 명문 의대 출신의 명의를 원한다. 비행기를 타면 조종 잘하는 기장을 바란다…(중략)… 진실과 과학을 거부하는 건 몰락의 길이다. ‘느낌 좋은 것’(what feels good) 대신 진실 자체를 마주해야만 발전할 수 있다.”

2,200여년의 시차에도 불구, 유방과 오바마는 인류 역사의 몇 안 되는 성공한 통치자다. 유방은 중국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였고, 오바마는 미국의 첫 유색인종 대통령이다. 둘의 공통된 통치 비결은 그들이 밝혔듯 전문가 중용이다. 유방이 항우처럼 범증(范增)을 외면했다면 한나라는 없었고, 오바마가 트럼프같이 굴었다면 인종 차별 때문에 시카고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운이 좋은 문재인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모처럼 전문가들의 말을 따랐는데, 총선 승리로 이어졌다. 주52시간, 소득주도성장, 대북 협상 등 임기 내내 헛스윙하다가 전문가 집단의 의견을 따랐는데, 그게 코로나 방역이다. 야당의 지리멸렬 행태는 여전했겠지만 총선이 대구 감염이 확산되던 3월 15일이나, 오거돈 성추행과 이태원발 코로나가 반영된 5월 15일 치러졌다면 선거 결과는 달라졌을 수 있다.

총선 압승 이후 여권에서 문 대통령은 성군 세종에 비견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전문가들의 목소리는 정책에서 소외되고 있다. 재난지원금 대상을 70%로 제한하려는 예산당국 뜻이 꺾인 게 대표적이다. 재정 규율이 무너지면서 올해 국가채무는 879조원,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율이 46.5%에 이른다는 전망도 나온다. 국제신용평가기관 피치가 ‘2023년 GDP 대비 채무 비율이 46%를 넘으면 한국 신용등급에 하방요인이 된다’고 지적했던 걸 감안하면 충격적이다. 여당이 기부 운동을 벌이지만 정권 눈치를 살펴야 하는 공공부문 고위층 일부를 빼면 열기는 뜨겁지 않다.

대통령이 ‘포스트 코로나’를 얘기하자마자 터진 이태원 사태도 전문가를 무시한 때문이다. 지난 3일 이재갑 한림대 교수가 “정치가 방역을 망친 날로 기록될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이 정부는 생활방역으로 전환했다. 결과는 5,000만 국민의 100일 협조로 구축된 방역망의 구멍으로 돌아왔다. 문 대통령이 내놓은 ‘선도경제’도 그렇다. 좋은 말의 잔치일 뿐이다. 정책 간의 상충, 국제적 역학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티가 역력하다. “노동 규제가 혁신을 가로막는 판국에 일자리도 지키고 혁신도 한다는 게 가능하겠냐”, “수도권 규제와 높은 세금에 대한 해결책은 제시도 않고 해외에 나간 공장을 돌아오라고만 하면 되느냐”는 비판이 나온다.

오바마 전 대통령 표현대로라면, 이 정부의 주류는 과학보다는 ‘느낌 좋은 것’을 선호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과학이 정책 판단의 근거가 돼야 한다. 정책 결정의 주류는 다수가 아니라 전문가여야 한다. 다수의 위력으로 전문가들의 판단이 뒤집어지는 나라에 미래는 없다. 국제적 리더십을 잃고 허덕이는 트럼프의 미국이 가장 가까운 본보기다.

조철환ㆍ뉴스3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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