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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실의 역사 속 와인] 엘리자베스 여왕 사로잡은 명품 와인, 그 뒤엔 종자 나눔이…

입력
2020.05.09 04:40
수정
2020.05.11 10:42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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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격주 토요일 <한국일보>에 찾아옵니다. 2018년 소펙사(Sopexaㆍ프랑스 농수산공사) 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자인 출판사 시대의창 김성실 대표가 씁니다.

비욘디 산티(Biondi-Santi) 와이너리에서 생산하는 와인들. 왼쪽부터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DOCG 리제르바,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DOCG 아나타, 로소 디 몬탈치노 DOC 페시아 로사, 로소 디 몬탈치노 DOC, 로사토 디 토스카나 IGT. 와이너리 홈페이지 캡처
비욘디 산티(Biondi-Santi) 와이너리에서 생산하는 와인들. 왼쪽부터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DOCG 리제르바,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DOCG 아나타, 로소 디 몬탈치노 DOC 페시아 로사, 로소 디 몬탈치노 DOC, 로사토 디 토스카나 IGT. 와이너리 홈페이지 캡처

캐나다에서 일어난 일이다. 50년 동안 농사를 지은 한 농부가 다국적 종자 회사 몬산토에 고소를 당했다. 고소장엔 몬산토의 특허받은 카놀라 종자를 농부가 무단으로 심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농부는 황망할 수밖에 없었다. 몬산토의 종자를 심은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봄이 되면 지난해 받아 둔 씨를 뿌리고 작물을 재배해 수확했다. 좋은 종자는 다시 남겨 다음 해 봄을 준비했다. 농부는 자신의 종자를 가꾸며 살아왔을 뿐이다. 그런데 고소장이라니,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실상은 이랬다. 이웃 농가에서 몬산토의 카놀라 종자로 작물을 재배했다. 어느 날 이웃의 카놀라씨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농부의 밭에 떨어졌고, 수십 년 동안 정성 들여 재배한 농부의 카놀라 사이에 몬산토의 카놀라가 함께 자라고 있었다. 이를 알아낸 몬산토가 자기 회사의 종자를 무단으로 재배했다면서 농부를 상대로 소송을 건 것이었다.

재판 결과는 어땠을까. 19명이나 되는 변호인단을 꾸린 몬산토를 상대로 농부는 전 재산을 털어 선임한 한 명의 변호사로 맞섰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보다 가혹하지 않던가. 농부는 패소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몬산토의 종자를 폐기해야 했다. 자신의 정성과 노하우가 담긴 종자마저 없애야 했다. 무너져 내린 농부의 모습은 그날 폐기한 것이 작은 종자만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이는 몇 해 전 방영된 ‘종자, 세계를 지배하다’라는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동명의 책을 출판한 적도 있거니와, 얼마 전부터 도시 텃밭에서 주말을 보내다 보니 이따금 ‘종자’ 생각이 싹처럼 돋는다. 필자는 땅콩 맛이 좋기로 유명한 고창에서 오빠가 구해 온 토종 땅콩을 텃밭에 심었다. 10여년 전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해 이젠 농부가 다 된 오빠가 예의 캐나다 농부가 그랬던 것처럼 해마다 좋은 씨앗을 골라내 ‘대’를 잇게 한 우량종자다.

포도나무도 이런 방식으로 밭에서 선별 육종한다. 오래된 여러 포도나무 가운데 풍토에 잘 맞고 건강하며 와인 메이커가 추구하는 맛과 향을 가진 나무(변종=클론)를 고른다. 그 가지를 잘라 대목에 접붙여 식재한다. 이런 방식으로 몇 대를 거치면 원하는 포도나무를 얻을 수 있다. 종자 회사의 종묘장에서 하나의 클론만 선택하여 대량으로 식재하는 방식(Clonal Selection)과는 분명 다르다. 농부가 자신의 밭에서 직접 선별 육종하는 이 방식을 ‘마샬 셀렉션(Massal Selection)’이라 한다.

이렇다 보니, 같은 품종의 포도나무라 해도 산지마다 집집마다 포도의 풍미가 다르다. 포도 맛이 다르니 당연히 와인 맛도 천차만별이다. 마치 우리 조상들의 씨간장처럼 한 집안의 고유한 맛과 향이 밴 포도나무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비욘디 산티 가문이 운영하는 일 그레포(Il Greppo) 포도밭 전경. 비욘디 산티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를 만드는 포도가 생산되는 밭이다. 리제르바는 25년 이상 된 나무의 열매로, 아나타는 10~25년 된 나무의 열매로, 알코올 발효 후 리제르바는 6년(오크숙성 3년, 병숙성 6개월), 아나타는 5년(오크숙성 3년, 병숙성 4개월) 숙성한다. 둘 다 작황이 좋은 해에만 만든다. 특히 리제르바는 작황이 매우 좋은 해에만 만든다. 와이너리 홈페이지 캡처
비욘디 산티 가문이 운영하는 일 그레포(Il Greppo) 포도밭 전경. 비욘디 산티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를 만드는 포도가 생산되는 밭이다. 리제르바는 25년 이상 된 나무의 열매로, 아나타는 10~25년 된 나무의 열매로, 알코올 발효 후 리제르바는 6년(오크숙성 3년, 병숙성 6개월), 아나타는 5년(오크숙성 3년, 병숙성 4개월) 숙성한다. 둘 다 작황이 좋은 해에만 만든다. 특히 리제르바는 작황이 매우 좋은 해에만 만든다. 와이너리 홈페이지 캡처

그런데 이렇게 육종한 귀한 포도나무를 이웃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 모두에게 나눠준 곳이 있다. 게다가 재배법과 양조법까지 전수해, 온 마을에 맛있는 와인향이 가득한 곳이다. 바로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의 작은 마을 몬탈치노다. 이 마을에서 만드는 와인을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dM: Brunello di Montalcino)라고 한다.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는 와인 애호가들이 꼭 마셔 보고 싶어 하는 와인이다. 문제는 가격이다.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는 법적으로 수확한 해부터 5년이 되는 1월 1일 이후에 출시해야 한다(리제르바는 6년). 여기에 오크 숙성을 2년 이상 한 뒤, 병 숙성도 4개월 이상 해야 한다(리제르바는 6개월). 그러니 비쌀 수밖에 없다. 물론 대안은 있다. 같은 품종으로 만든 로쏘 디 몬탈치노(Rosso di Montalcino)라는 와인은 가격도 맛도 접근하기에 부담 없다. 몬탈치노 마을에서 비교적 어린 브루넬로 품종으로 숙성기간이 조금 더 짧고 완화된 규정으로 만든다.

와인 이름 맨 앞에 붙은 ‘브루넬로’는 종자 나눔을 실천한 비욘디 산티 가문이 육종한 포도나무의 품종 이름이다. 1932년, 이탈리아 농림부는 비욘디 산티 가문의 페루치오를 이 품종의 창시자로 공인했다. 페루치오는 외할아버지 클레멘테(Clemente Santi)에게 포도밭을 물려받았다. 클레멘테는 비노 로쏘 스켈토 브루넬로(Vino rosso scelto: Brunello)로 1869년에 몬테풀치아노 농업평가회에서 은메달 2개를 받았을 정도로 열정적인 와인 메이커였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브루넬로라는 품종 이름이 처음 등장한 건 바로 그의 외할아버지 때부터였다.

브루넬로는 산지오베제의 변종(클론) 가운데 산지오베제 그로소라는 품종이다. 토스카나 지방에서 주로 심는데, 몬탈치노 마을에서 재배하는 이 변종을 특별히 브루넬로라 부른다.

브루넬로는 원종(原種)인 산지오베제처럼 산도도 높지만 타닌 또한 강해 시고 떫다는 특징이 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와이너리는 여러 품종을 섞어 신맛과 떫은맛을 줄였다. 바로 바로 마시기 좋은 와인을 만들어 팔아야 돈이 잘 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페루치오는 높은 산도와 강한 타닌이 와인의 숙성력을 높인다는 사실을 알았다. 단점이라 여겨 감추려던 허물이 외려 숨겨진 보물인 경우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페루치오는 다른 품종을 섞지 않았을 뿐 더러, 외려 더 작고 더 검푸른 브루넬로 100%로 와인을 담갔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장기 숙성형 와인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발효를 마친 와인을 커다란 슬라보니안 오크통에 넣어 5년 동안 숙성했다. 높은 산도와 강한 타닌은 긴 숙성 기간 동안 와인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정교한 구조감과 부드러운 질감을 지닌 명품 와인을 빚어냈다. 1888년, 마침내 비욘디 산티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의 첫 빈티지 와인이 탄생했다.

사실, 페루치오는 온갖 역경 속에서 와인을 빚었다. 포도나무 전염병인 흰가루병(Oidium)과 필록세라를 겪어 냈고, 제1차 세계대전을 치렀다. 그러는 사이 몬탈치노의 농가 대부분이 포도 농사를 포기했지만, 페루치오만은 브루넬로 품종을 꾸준히 재배해 와인을 만들었다. 과연 페루치오 덕분에 브루넬로 품종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비욘디 산티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리제르바 1888년산과 1891년산(왼쪽). 리코르킹을 시행하는 모습(가운데)과 리코르킹 인증서를 부착한 비욘디 산티의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리제르바 1955. 와이너리 홈페이지 캡처
비욘디 산티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리제르바 1888년산과 1891년산(왼쪽). 리코르킹을 시행하는 모습(가운데)과 리코르킹 인증서를 부착한 비욘디 산티의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리제르바 1955. 와이너리 홈페이지 캡처

역사의 곡절 속에서 살아남은 비욘디 산티 와인은 유명인을 만나 이름을 떨치게 된다. 물론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입소문이 났지만, 그 진가를 세상에 널리 알린 이는 엘리자베스 여왕이었다. 1969년, ‘비온디 산티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리제르바 1955’를 맛본 엘리자베스 여왕이 감탄을 금치 못했고, 이 소문이 퍼지며 와인의 명성 또한 높아졌다.

한편, 숙성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도 받았다. 1994년에 열린 시음회에 첫 빈티지인 1888년산과 1891년산을 포함해 100년 동안 생산한(1888~1988) 15개 빈티지 와인이 나왔다. 이 가운데 1891년산이 특히 훌륭한 맛과 향을 가졌다고 평가됐다. ‘디캔터(Decanter)’의 저널리스트 니콜라스 벨프리지는 “어떤 인간이 103세의 이 와인만큼 건강하겠는가!”라며 찬사를 보냈다.

사실, 애호가들은 비욘디 산티가 만든 와인의 진가를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페루치오의 대를 이어 비욘디 산티를 이끈 탄크레디(Tancredi Biondi Santi)는 1927년부터 오래된 와인을 리코르킹(Recorking)해주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같은 빈티지의 와인으로 채워(Topping up), 코르크로 다시 봉한 뒤 레이블과 인증서까지 붙여 준다. 특히 1970년 3월에는 이 서비스를 위해 셀러에 보관 중이던 1888년산과 1891년산, 1925~1945년산 올드 빈티지 와인이 대거 세상에 나왔는데 그 맛이 여전히 생생하고 훌륭해 애호가들의 감탄을 자아냈다고 한다.

이러한 명성에 걸맞게 1999년에는 여왕의 와인이란 별칭을 얻은 1955년산 리제르바 와인이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에서 선정한 ‘20세기 최고 와인 12종’ 가운데 이탈리아 와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2011년에는 와인 전문지 ‘비벤다(Bibenda)’에서 이탈리아 통일 150주년을 기념해 1964년산 리제르바를 심볼로 선정했다. 명실공히 국가를 대표하는 와인으로 인정한 것이다.

브루넬로 품종을 창시한 페루치오 비욘디 산티(왼쪽)와 품종 나눔을 실천한 프랑코 비욘디 산티. 비욘디 산티 와이너리의 이름은 페루치오의 아버지 자코포 비욘디(Jacopo Biondi)와 어머니 카테리나 산티(Caterina Santi)의 성을 합쳐 지었다. 홈페이지 캡처
브루넬로 품종을 창시한 페루치오 비욘디 산티(왼쪽)와 품종 나눔을 실천한 프랑코 비욘디 산티. 비욘디 산티 와이너리의 이름은 페루치오의 아버지 자코포 비욘디(Jacopo Biondi)와 어머니 카테리나 산티(Caterina Santi)의 성을 합쳐 지었다. 홈페이지 캡처

페루치오가 브루넬로 품종을 창시해 맛을 완성했다면, 이 품종을 몬탈치노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나눔의 가치를 실현한 이는 페루치오의 손자이며, 탄크레디의 아들인 프랑코 비욘디 산티이다. 프랑코는 선대의 업적에 안주하지도 않았다. 품질을 더 높이기 위해 브루넬로 품종의 오래된 나무를 또다시 선별 육종했다. 마침내 그는 BBS11(Brunello Biondi Santi 11)이라는 좋은 품종을 얻을 수 있었다.

별로 좋아하는 말은 아니지만, 이런 사실을 살피다 보면 집안 내력이라는 게 있구나 싶다. 프랑코는 대를 이어 힘들게 노력해 얻은 품종을 독점하지 않고,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노하우가 담긴 양조법도 가르쳐, 이웃 생산자들이 뒤처지지 않고 평균 이상의 맛을 내게끔 적극 도왔다고 한다.

프랑코는 와인 관련한 일에서뿐만 아니라 몬탈치노 마을을 위한 모든 일에 솔선수범했다. 한마디로 마을의 ‘홍반장’이자 ‘어른’이었던 셈이다. 몬탈치노 마을을 자연 친화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오래된 마을 수도원을 복원하는 등 몬탈치노를 아름다운 와인의 고장으로 가꾸려고 정성을 기울였다.

그의 부단한 노력 덕분에 1967년에 76㏊에 불과하던 마을 포도밭이 2009년에는 2100㏊까지 늘었다. 포도 농가도 210여곳이 됐다. 1980년에는 몬탈치노의 와인, 즉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가 이탈리아 와인의 최고 등급인 DOCG를 최초로 부여받았다. 당시 DOCG 등급을 받은 곳은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와 더불어 바롤로, 바르바레스코,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 4곳뿐이었다.

브루넬로 품종을 창시한 페루치오도, 종자 나눔을 실천한 프랑코도 이제 이 세상에 없다. 하지만 그들 비욘디 산티 가문의 노력이 바탕이 되어 몬탈치노는 토스카나와 이탈리아를 넘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와인 마을이 되었다. 지금도 몬탈치노 마을 곳곳에서 와인 장인들이 바롤로, 바르바레스코, 아마로네와 함께 이탈리아 4대 명품 와인을 만들고 있으리라.

명품의 가치는 정성을 쏟되 나눔에 있음을 비욘디 산티 가문의 브루넬로 품종이 증명한다. ‘자본의 법’이 아무리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예의 캐나다 농부와 몬산토, 둘 가운데 종자를 훔친 자가 누구인지를, 종자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어느 날 바람결에 토종 씨앗이 날아다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농부의 밭에 내려앉아 고소장이 아닌 희망의 싹을 틔웠으면 좋겠다.

시대의창 대표ㆍ와인 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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