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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선의 공존의 지혜] 슬기로운 병원생활

입력
2020.04.29 18:00
수정
2020.04.29 19:04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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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슬기로운 의사생활’. tvN 제공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 tvN 제공

한 달 전쯤 종합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3일간 입원을 했다. 교통사고로 화상을 입고 초반 3년간은 큰 병원에서 입퇴원을 반복하며 피부이식수술을 받고 이후로는 작은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있어서 종합병원에서의 수술과 입원은 거의 17년 만인 셈이다. 이번에는 화상과 관련 없는 곳에 작은 이상이 생겨서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종합병원 경험이 정말 오랜만이라 전과 달라진 점들이 아주 인상깊게 남았다.

당일 수술센터에서 이동 침대에 실려 수술실로 가는 길에 정말 오랜만에 수술실 복도의 천장을 보면서 긴장한 상태로 수술실로 들어갔다. 이런 식으로 수술실에 스무 번 가까이 들어가보았지만, 단 한 번도 내게 인사를 건네는 적은 없었다. 누워서 들어오게 되었지만 그래도 ‘사람’이 들어왔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를 데리고 온 분이 환자가 들어왔다고 하자 의료진이 먼저 인사를 하며 많이 기다렸는지, 일상적인 대화를 건네 왔다. 그곳에서 나는 그들의 일거리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수술 준비를 마치고 마취 직전, 태블릿PC로 촬영하면서 본인 확인과 수술 내용을 알고 있는지 확인했다. 의료진도 환자도 보호하는 것이었다. 여러모로 세상 참 좋아졌구나 생각하며 잠이 들었고 깨어나니 수술은 끝났고 회복실을 거쳐 병실로 옮겨졌다. 이제 병실의 침대로 옮아가야 하는, 내가 참 싫어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수술이나 치료를 마치고 침대를 옮겨야 할 때 여러 명의 의료진이 이쪽과 건너편 침대에서 내가 누워 있는 침대시트를 잡고 들어올려 하나 둘 셋 하고 옮기거나, 내가 누워서 상체와 하체를 번갈아 움직여가며 (애벌레처럼) 옮아가는 식이었는데, 어느 쪽이든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몸을 한쪽을 살짝 들어 달라고 하더니 내 등 아래 침대시트 밑으로 넓은 판자를 밀어 넣고 그 판자를 기울이니 몸이 스르륵 미끄러지며 병실 침대로 몸이 옮겨지는 것이 아닌가! 누가 생각해 냈는지 이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힘도 덜 들이고 환자의 수치감을 없애 준 그 분이 정말 고마웠다.

6인실 병실에 입원했다. 이제는 각 침대마다 커튼이 있어서 시각적인 사생활은 보장되지만 사실 소리로는 완벽한 한 방 생활이다. 직접 시시콜콜 묻고 대답을 듣지 않아도, 의료진이나 가족과 하는 대화 속에서 어떤 병 때문에 무슨 수술을 받고 며칠째 입원 중인지 금세 파악이 된다. 나 빼고는 모두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으셨다. 회진 때 내 건너편 환자분은 개복을 해보니 암 4기였고 항암치료를 수차례하게 될 거라고 했다. 남편분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와 부인을 붙잡고 우는 소리가 들렸다. 초로의 남성이 꺼억꺼억 우는 소리는 정말 슬픈 소리였다. 내 옆의 여자분도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같이 산티아고 길 걷자고 했는데, 당신이 건강해야지.” 그렇게 한참을 울다 마음을 추스르고 백 살까지 살자고 서로를 다독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 방에 있는 모두가 조용히 그 울음을 들었다. 아무도 서로 알은체 하지 않고 섣부른 위로도 건네지 않는다. 비슷한 부위에 정도는 다르지만 비슷한 병을 얻어 비슷한 때에 입원을 한 여섯 명의 환자와 가족은 며칠간 한 방에서 지내며, 말하지 않지만 한마음으로 같이 울고, 아직 금식 중인 분들한테 미안해하며 조용하면서도 빠르게 식사를 하고, 앞에 환자가 어제보다 오늘 더 잘 걷는 모습을 보면 내 일처럼 기쁘고, 잘 회복해서 언젠가는 꼭 부부가 같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를 한마음으로 응원하게 된다.

전에 입원했던 병원마다 회진 때면 막내의사가 먼저 와서 곧 오실 최고참 의사의 길을 예비하고 환자를 준비시키면 꼭 말발굽소리 같은 소리를 내며 우르르 들어와 환자를 구경(?)하고, 몇 마디 지시 사항을 듣는 식이었는데, 이번엔 조용한 목소리로 환자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는 의사들을 보았다. 작은 말실수에도 곧바로 사과하는 모습도 보았다. 요즘 방영되는 병원 드라마에서의 의사들처럼 자신의 이야기도 오픈하며 환자들의 인생에 개입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드라마틱한 변화로 느껴졌다. 병원 생활을 해보면 제일 고마운 사람이 의료진임에도 불구하고 또 의료진에게 상처받는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나는 환자 입장에서 말하고 있지만 서로 스트레스가 높은 상태에서 만나는 관계이다 보니 사실 양쪽 다 할말이 많을 것이다. 이번 병원 생활을 통해 병원이 얼마나 환자 중심으로 변하고 있는지 보였다.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로, 환자는 도움을 구해야 하는 약자가 아닌 의료 서비스를 받는 소비자의 입장으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권리가 있고,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와 수치심을 당하지 않을 권리가 보장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병원을 다니며 억울하고 답답할 때마다 어머니는 “아픈 사람이 죄인인 거야”하며 달랬다. 환자는 죄인이 아니다. 환자도 사람으로 대하는 병원에서 의사든, 간호사든, 환자든, 직원이든 병원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슬기로운 병원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지선 한동대 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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