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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진의 융통무애(融通無碍)] 몸에 옷을 맞추자 그리고 살을 빼자

입력
2020.04.01 18:00
수정
2020.04.02 11:39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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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청계천에 설치된 ‘아름다운 선거 조형물’.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 청계천에 설치된 ‘아름다운 선거 조형물’. 한국일보 자료사진

우리의 희망과는 달리 정치나 예술은 돈이 많이 든다. 오죽하면 “집안이 빨리 망하려면 아들에게 정치를 시키고, 천천히 망하려면 딸에게 예능을 시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정치 지망생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국가에게는 전쟁이 그렇다. 이기던, 지던 전쟁을 치른 뒤에는 정부가 빚더미 위에 앉는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 영국 등 승전국들의 국가 부채비율도 굉장히 높다. 승전국들은 그것을 자유와 정의를 지킨 비용이라고 믿으며, 애써 위안을 삼는다.

전쟁은 뒤끝이 있다. 전쟁 중의 뜨거웠던 애국심은 차가운 이해타산으로 바뀌고, 서로 양보하지 않는다. 미국의 독립전쟁은 사실상 5년 만에 끝났지만, 13개 주가 전쟁비용 분담원칙에 합의하는 데는 9년이 걸렸다. 남북전쟁은 4년 만에 끝났지만, 전쟁 중에 잠시 이탈한다고 믿었던 금본위제도를 다시 채택하는 데는 17년이 걸렸다.

전쟁 비용 처리를 두고 원칙론자와 현실론자의 생각은 정반대다. 원칙론자들은 전쟁이 끝났으면, 빚도 빨리 갚아야 한다고 믿는다. 거기에 따르는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종교적 인내심으로 견디려고 한다. 19세기 영국은 전쟁이 끝난 뒤 국채 상환에 관한 법률을 만들 때 전환(conversion)이나 상환(redemption)이라는 말을 붙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와 구원(conversion and redemption)’을 함축한다. 국가 부채를 방탕과 무절제의 산물로, 국가 부채의 축소를 회개와 구원으로 본 것이다.

반면 현실론자들은 급하게 늘어난 빚은 ‘엎질러진 물’이라고 보고, 천천히 갚아야 한다고 믿는다. 국가 부채를 줄이는 고통은 가난한 사람에게 항상 더 가혹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은 국가 부채를 ‘국가의 축복’이라고 했다. 국채 상환을 위한 세금을 거두면서 13개 주가 비로소 진정한 공동운명체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국채에 투자한 부자들이 원리금 회수를 위해서 신생국 미국의 발전에 동참한다고 생각했다.

남북전쟁 직후 미국은 영국을 좇아서 원칙론을 따랐다. 국민과 약속을 지키고, 국가 신인도를 높인다는 이유로 국채상환법을 제정했다. 덕분에 부자들이 헐값으로 샀던 국채와 달러화의 가치는 폭등했지만, 지독한 경기 불황이 찾아왔다. 무수한 서민들이 일자리를 잃고, 체제를 부정하는 급진 좌파정당과 포퓰리즘이 고개를 들었다. 링컨대통령의 후예인 공화당이 전쟁 전의 인종갈등을 전쟁 뒤에 계층갈등으로 바꿔버렸다. 국가부채의 축소가 ‘회개와 구원’은커녕 ‘분노와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금본위제도 복귀에 시간이 걸린 이유가 거기 있었다.

원칙론자와 현실론자는 전쟁이 아니더라도 맞부딪친다. 국가관의 차이 때문이다. 원칙론자들은 국가도 개인처럼 분수에 맞춰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양입제출(量入制出), 즉 세수에 맞춰서 지출을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옷감에 맞춰서 외투를 재단하라(cut your coat according to your cloth)’는 서양 속담 그대로다.

그러나 옷은 몸에 맞추는 것이 상식이다. 나라살림이 아무리 어려워도 국방, 치안, 교육 등 중요 기능은 양보할 수 없다. 그래서 현실론자인 당나라 덕종은 양출제입(量出制入), 즉 지출부터 생각하고 세수는 후순위에 두는 원칙을 세웠다.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가 8세기 덕종의 국정철학을 현대화했고,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들이 그 원칙을 따르고 있다.

지금 우리는 개인의 위생에서 경제와 외교에 이르기까지 넓은 전선에서 바이러스와 전쟁을 치르고 있다. 원칙론과 현실론이 맞붙는다. 나라의 씀씀이는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

중세의 흑사병처럼 수십 만이 목숨을 잃도록 해서는 안 된다. 유례없는 경제난을 각자 알아서 버티라며 외면할 수 없다. 국민 건강과 약자 보호는 현대국가의 의무요, 존재이유다. 당장 나랏빚이 늘어나더라도 건강하게 살아남은 사람들의 왕성한 생산과 소비를 통해 나랏빚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그것이 케인즈의 가르침이다. 해밀턴의 말대로 적절한 국가 부채는 국가의 축복이다.

그러나 나라의 씀씀이가 마구 늘어나서도 곤란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은 전쟁 배상과 통일 비용까지 다 치르고서도 국가 부채가 GDP의 60% 이하다. 그에 비해 승전국 그리스는 174%, 비교적 중립을 지켰던 스페인은 96%다. 그렇다고 그리스와 스페인의 도로와 항만, 교육시설이 독일보다 더 나은 것도 아니다. 승전국 그리스와 스페인의 국가 부채는 자유와 정의를 지킨 비용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것은 나라의 씀씀이를 제대로 줄이지 못한 정치인을 선택한 결과다.

국가는 개인과 다르다. 국가는 옷감이 아닌 몸에 옷을 맞추는 지혜가 필요하다. 동시에 살을 빼는 실천력을 가져야 한다. 우리나라가 지혜와 실천력을 함께 갖추려면, 결국 좋은 정치인을 뽑아야 한다. 노래방에서 ‘아무 노래’는 좋지만, 선거판에서 ‘아무 후보’는 곤란하다. 유권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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