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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뉴구세요?] 신변 위협에도 ‘N번방’ 소환한 프로젝트 리셋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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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뉴구세요?] 신변 위협에도 ‘N번방’ 소환한 프로젝트 리셋을 만나다

입력
2020.04.01 08:00
수정
2020.04.01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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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들끼리도 서로의 이름 몰라” 익명으로 피해자 도와

모니터링ㆍ증거수집으로 시작해 근절 방안 마련까지

[저작권 한국일보] 프로젝트 리셋 활동가 정O(왼쪽), 대O씨가 지난달 29일 한국일보 스튜디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설이PD
[저작권 한국일보] 프로젝트 리셋 활동가 정O(왼쪽), 대O씨가 지난달 29일 한국일보 스튜디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설이PD

“꼭 여성분들만 오셔야 합니다.”

어렵게 잡은 인터뷰 약속, 그런데 낯선 요청이 왔습니다. 취재진 모두 여성이여야 한다니,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그래도 여성 취재진을 꾸려 그들을 만났습니다. 프로젝트 리셋(Project ReSET).

들어는 보셨지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을 음지에서 양지로 꺼내온 이들입니다. 리셋은 이른바 ‘N번방 사건’ 초기 트위터에서 ‘N번방’을 포함한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의 폐해를 알리고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통해 신고할 수 있게끔 이끌어내는 역할을 했는데요. 이후 국회 청원 등을 통해 디지털 성범죄 근절을 위한 법안 마련의 토대가 되는 자료집을 만들어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 도움을 주기도 했어요. 최근에는 경찰청 긴급 회의와 국회 간담회에 초청돼 자문 역할을 맡고 있죠.

‘리셋’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을 고발한다는 영어(Reporting Sexual Exploitation in Telegram)의 앞 글자를 따 ‘ReSET’이라고 줄였고요. 동시에 “강간문화로 잃어버린 디지털 공간의 여성 안전을 다시 세운다”는 뜻을 담았다고 해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을 공론화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 이들은 그 어디에도 자신들의 이름을 남기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일보 취재진이 지난달 29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 스튜디오에서 프로젝트 리셋 여성 활동가 두 명을 만났을 때도 그들의 실명이나 나이, 실제 직업을 알 수 없었죠. 이날 함께한 활동가들끼리도 서로의 이름을 모른다고 합니다. 밥 한끼, 차 한잔 함께 해보지 않은, 정말 일만 함께 하는 사람들인 거죠.

이날 인터뷰에서 활동가 한 명은 대O, 다른 한 명은 정O으로 불리길 원했습니다.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그들이 왜 익명을 고집하는지, 왜 여성 취재진만을 원했는지 하나 둘 의문이 풀렸습니다.

-프로젝트 리셋에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요.

대O(대) =“SNS에서 ‘신고 총공(디지털 성범죄를 신고하는 링크를 공유하며 함께 신고하는 캠페인)’을 개인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가 리셋이 (활동가) 추가 모집을 한다고 해서 합류했습니다.”

정O(정) = “언론 보도에서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을 알게 된 뒤 리셋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했어요. 앞서 소라넷(불법 음란물 유포 사이트) 사건부터 디지털 성범죄를 지켜보고 있었는데요. 개인적으로 실제 디지털 성범죄 사건에서 참고인으로 피해자를 도와준 경험도 있었죠. 그렇다고 생업과 리셋 활동이 연관이 있는 건 아니에요.”

-보수도 없잖아요. 왜 모인 거죠?

대 = “텔레그램에서 신고하고, 증거를 모으고, 피해자에게 알리고, 수사할 수 있게끔 하는 활동들은 혼자 할 때보다는 여럿이 할 때 효과가 좋습니다. 또 프로젝트 리셋은 처음에 모니터링과 신고뿐만 아니라 국회 입법 청원도 진행 중이었는데요. 보다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다 같이 모인 것입니다.”

-리셋의 역할,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정 = “처음엔 모니터링과 채증을 통해 피해자를 돕고 가해자를 엄벌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최근엔 보다 근본적인 해결 방안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국회 긴급 간담회 또는 경찰청 사이버 성폭력 전담반 긴급회의에 참석하는 것도 그런 이유죠. 사실 리셋은 피해자 지원단체라거나 피해자들이 모여 만든 단체는 아니에요. 피해자가 특정될 경우 연락해서 대응할 수 있도록 알려주고 피해자 지원 단체나 법적 절차를 알려주는 것이 주 업무 입니다.”

-특별조사팀, 특별수사단을 여성으로 이뤄지도록 요구했다고 들었어요. 취재진도 전원 여성을 요청했는데 왜 그런 거죠?

대 = “2018년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보고서에 따르면 피해자 93.3%가 여성이에요. 그런데 같은 해 경찰청 사이버 성폭력 수사팀원 중 여성은 1,2명에 그치는 것으로 확인됐고요. 여성 피해자들이 조사를 받을 때 느낄 부담감을 덜기 위해서라도 여성 경찰관이 있어야 한다고 봤어요.”

정 = “오늘 인터뷰에 취재진을 여성으로 구성해달라고 한 이유는 리셋 활동가들의 신변 보호가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전에 남성들이 몰래 숨어 있다가 방해하고 현장을 어수선하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여성분들로 취재진을 구성해달라고 했습니다.”

대 = “텔레그램 성착취방 모니터링을 하다 보면 활동가들을 어떻게 해버려야 한다는 말을 쉽게 볼 수 있어요. 신변보호에 더 신경 쓰고 있는 이유죠.”

[저작권 한국일보] 프로젝트 리셋 활동가 정O(왼쪽), 대O씨가 지난달 29일 한국일보 스튜디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설이PD
[저작권 한국일보] 프로젝트 리셋 활동가 정O(왼쪽), 대O씨가 지난달 29일 한국일보 스튜디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설이PD

-피해자를 돕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점이 뭘까요.

정 = “이른바 ‘지인능욕’이라는 범죄의 경우, 피해자가 가해자들이 있는 텔레그램 단체 대화방에 들어가 있지 않는 이상, 피해 사실조차 몰라요. 모니터링하는 사람들이 3자 고발을 해야 하는데, 피해자가 누구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도 수사기관에서는 그냥 되돌려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발 3자 고발을 활성화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대 = “디지털 성범죄가 밤낮을 가려서 일어나는 건 아니거든요. 매우 짧은 시간에 유포가 일어나는 경우도 많고요. 스트리밍으로 유출하는 성착취물은 올라온 지 5분만에 사라지고요. 우리가 신고한 뒤 수사기관이 그 방을 찾기까지 24시간 안에 해결해야 해요. 그런데 어느 날은 피해자가 직접 가해 정황을 목격해서 경찰에 신고하고 리셋에도 연락을 줘서 우리가 결정적 증거를 모아 경찰에 연락했는데 ‘근무시간이 아니다. 월요일에 다시 연락 달라’ 더군요.”

-디지털 성범죄가 다른 성범죄와 달리 피해자들이 유독 피해 사실을 알리기 부담스러워한다고요.

대 = “지난해 12월 발표된 서울시의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첫 피해 실태조사’에 따르면 디지털 성범죄 피해를 겪은 후 신고 등 대처를 한 경우는 7.4%에 그치고 있어요. 피해 사실이 알려질 까봐 걱정돼서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 피해자가 30.6%나 되죠. 결국 이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감내해야 할 사회적 위험이 크고 우리 사회에 피해자 통념이 강력히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피해자에게도 어느 정도 잘못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든지 하는 거죠.”

[저작권 한국일보]프로젝트 리셋 활동가 정O(왼쪽), 대O씨가 지난달 29일 한국일보 스튜디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설이PD
[저작권 한국일보]프로젝트 리셋 활동가 정O(왼쪽), 대O씨가 지난달 29일 한국일보 스튜디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설이PD

-프로젝트 리셋 활동 과정에서 협박을 당하거나 어려움이 많다는데요.

대 = “트위터 공식 계정과 인스타그램 공식 계정이 일시 정지된 적이 있어요. 이게 불특정 다수의 신고 때문이었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리셋 활동을 막기 위해 똘똘 뭉쳤는지를 알 수 있는 거죠. 넘쳐나는 디지털 성 착취 계정들은 멀쩡히 두고, 왜 리셋 계정을 정지시켰는지 플랫폼 회사 측에 묻고 싶네요.”

정 = “텔레그램 단체대화방에서 리셋 행세를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사칭이죠. 디지털 성범죄자들도 리셋의 존재를 알고 눈 여겨 보고 있다는 것이죠.”

대 = “리셋은 절대 후원을 받지 않거든요 그런데도 리셋의 계좌로 후원을 받고 있다는 제보가 옵니다. 만약 리셋 후원 계좌를 목격하신다면 그건 모두 사칭이니까 저희에게 제보를 부탁 드려요.”

리셋은 지난달 23일 국회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회의실에서 열린 ‘텔레그램 N번방 성범죄 처벌 강화 긴급 간담회’에 참석해 성범죄 근절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증거인멸을 막기 위해 구속 수사 의무화 △피의자 디지털 기기 압수수색 △제3자 경찰 신고 접수 의무화 등의 내용을 담았습니다.

-구속 수사 의무화가 디지털 성범죄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는데요.

정 = “불법촬영물 수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범죄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확보하는 건데요. 피의자가 동의하지 않거나 절차 상 문제로 압수가 바로 이뤄지지 않으면 증거물을 확보하기가 어렵다고 해요.”

대 = “텔레그램에서 디지털 성착취범들이 자랑하는 게 있어요. 자기들이 갖고 있는 성착취물 용량인데요. 보통 1테라바이트(TB)를 훌쩍 넘겨요. 구속 수사를 하면 그 증거물을 찾아내서 제대로 수사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거죠. 반면에 불구속 수사를 하면 어떻겠어요. 스마트폰 지우고, 하드 파손하면 끝이잖아요.”

[저작권 한국일보] 프로젝트 리셋 활동가 정O(왼쪽), 대O씨가 지난달 29일 한국일보 스튜디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설이PD
[저작권 한국일보] 프로젝트 리셋 활동가 정O(왼쪽), 대O씨가 지난달 29일 한국일보 스튜디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설이PD

-이번 ‘N번방 사건’을 보면서도 범죄를 근절하려면 국제공조가 절실하겠다 싶던데요.

정 = “맞아요. 현재 국제 공조수사가 매우 느립니다. 페이스북 대상의 수사도 빨라야 2개월, 심지어 6개월을 끄는데요. 그래서 우리나라도 부다페스트 협약에 가입해야 한다고 촉구를 하고 있습니다. 2001년 마련된 이 협약에는 현재 71개국이 참여하고 있는데요. 협약 조항에 따라서 아이피(IP)나 데이터 발신지, 수신지 정보 등을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텔레그램 서비스 제공자 같은 플랫폼 사업자에게 이런 데이터를 보전하고 있어달라고 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되는 거죠.”

그는 지난해 2월쯤 법무부에서 협약 가입을 논의하겠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후 진행 상황은 잘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저작권 한국일보] 프로젝트 리셋 활동가 정O(왼쪽), 대O씨가 지난달 29일 한국일보 스튜디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설이PD
[저작권 한국일보] 프로젝트 리셋 활동가 정O(왼쪽), 대O씨가 지난달 29일 한국일보 스튜디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설이PD

-수많은 활동을 하자면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들 텐데요.

정 =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디지털 성범죄 해결을 촉구하는 국회 국민동의 청원이 지난 2월 10만명 동의 요건을 충족해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와 브리핑을 하게 된 일이 있었어요. 그때 필요한 200장 분량의 자료집을 4일만에 준비했는데요. 디지털 성범죄를 뿌리 뽑고 싶어하는 수많은 여성들을 대표해 말한다는 생각에 본업을 잠시 미루고 팀원들 모두 잠 자는 시간도 줄여 가며 노력했지요.”

대 = “사실 이런 일을 전문 기관의 전문 인력이 아닌 평범한 우리가 떠맡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아요. 그래도 필요한 일이고, 피해자들에게 도움될 수 있고 가해자들을 처벌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힘든 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선 디지털 성착취 현안 파악조차 못하고 법안을 심의했다고 하죠.

정 = “국민동의 국회청원이 생긴 것도 국민 의견을 반영한 법안을 입법하겠다는 뜻이잖아요. 우리도 회의를 생중계로 보다가 많이 허탈했어요. 리셋 측에선 성명문을 냈고, 심지어 회의에서 나온 몇몇 2차 가해성 발언에 대해선 유감을 갖고 있습니다.”

-앞으로 계획은요.

정 = “익명의 여성들이 모여 활동하는 단체여서 다른 익명의 여성들과도 연대하고 있어요. 지금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관련해 시위하는 단체와도 연대하고 있고요. ‘여성의당’은 제1공약으로 디지털 성범죄에 관한 공약을 세웠는데 우리의 활동 취지와 잘 맞는다고 생각해 관련 내용만 저희가 협약을 맺었어요. 또 ‘화난 사람들(공동 소송 플랫폼)’에서 디지털 성범죄 양형 기준 재정비 등을 추진 중인데 우리가 탄원서 제출하는 일을 맡았어요. 많이 참여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대 = “텔레그램 ‘n번방 사건’으로 이목을 끌었지만, 디지털 성범죄가 이 사건 하나 해결한다고 해서, 가해자 한 명 처벌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결국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해 피해자들과 함께 정책 문제, 법률 문제 해결을 목표로 계속 활동 이어가야죠.”

[저작권 한국일보] 프로젝트 리셋 활동가 정O(왼쪽), 대O씨가 지난달 29일 한국일보 스튜디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설이PD
[저작권 한국일보] 프로젝트 리셋 활동가 정O(왼쪽), 대O씨가 지난달 29일 한국일보 스튜디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설이PD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정 = “피해자들에게 흔히 하는 말 중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게 있는데요. 의도는 알겠는데,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건 가해자거든요. 피해자들이 움츠러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대 =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과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많은 분들이 끝까지 관심을 가져 주시길 바랍니다.”

이정은 기자 4tmr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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