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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복수초 연가

입력
2020.03.30 0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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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초. 조영학 작가 제공
복수초. 조영학 작가 제공

정선 만항재는 입구부터 눈이 두텁게 쌓였다. 오늘은 기대할 만한대요? 내가 동료에게 중얼거렸다. 어제, 그제, 이곳에 눈이 내렸다는 소문만으로 250㎞를 달려왔다. 3월의 춘설은 그 자체로 축복이지만, 야생화 관련 글을 준비 중이기에 의미가 더 크다. 설중화, 눈을 뚫고 꽃송이를 활짝 여는 꽃들을 말한다. 겨우내 얼어붙은 땅을 비집고 작고 가녀린 꽃송이를 피워 올렸건만 그 위로 눈이 쌓여 더욱더 처연한 풍경을 연출하는 것이다. 변산바람꽃, 한계령풀, 얼레지, 복수초, 앉은부채…… 모두 이른 봄 눈 속에서 꽃을 피우는 설중화이지만 오늘은 그중 복수초를 만날 생각이다.

복수초. 눈부신 황금 잔을 닮은 꽃이다. 그해 제일 먼저 꽃을 피운다 하여 원일초(元日草)라고도 불리는데 실제로 강원도 어느 도시에서는 정월 초면 어김없이 노란 꽃잎을 열고 봄이 왔음을 알린다. 몇 해 전 ‘노란 복수초’라는 드라마 때문에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복수초의 이름은 원한이 아니라 복과 장수를 뜻한다. 일본에서는 봄이면 서로 복수초를 선물하는 풍습도 있다. 눈 속에 핀 연꽃을 닮아서 설연화(雪蓮花), 눈과 얼음을 뚫고 나온다 하여 눈색이꽃, 얼음새꽃,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도 여럿 있지만 나라에서 권하는 이름은 여전히 일본식 이름인 복수초다.

눈 속에 핀 연꽃이라지만 설연화를 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1,200m 고지 산정인데도 기온이 높아 봄눈은 말 그대로 봄눈 녹듯 사라져 버린다.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눈 속에 깊이 파묻히거나 아니면 눈이 금세 녹고 만다. 야생화에 관심을 둔 지 10년이 훌쩍 넘도록 진짜 설중 복수초를 보지 못한 이유도 그래서다. 오늘은 운이 좋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설중화를 보러 온 사람들이 산기슭을 오가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복수초. 조영학 작가 제공
복수초. 조영학 작가 제공

복수초는 내가 제일 사랑하는 봄꽃이다. 귀한 꽃도 많지만 난 어느 야산에나 자라는 복수초가 제일 좋다. 복수초를 자세히 본 적 있어요? 내가 동료에게 다시 물었다. 복수초를 보면 안다. 왜 복수초가 대표적인 봄꽃이어야 하는지. 세상의 온 빛을 다 담을 듯 샛노란 꽃잎, 수십 개의 가늘고 긴 수술, 그 가운데 연둣빛의 도톰한 암술, 줄기 허리쯤 앙증맞게 붙은 진녹색의 이파리……난 복수초를 볼 때마다 먼 옛날 황제들이 술을 담아 마셨다는 황금 잔을 떠올린다. 그리스, 로마의 장인들이 정말로 복수초를 본떠 술잔을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귀족들은 그 잔에 술을 따라 마시며 잠시 속세를 잊고 사랑과 향락을 꿈꾸었을 것이다. 복수초 학명에도 아프로디테의 연인, 아도니스의 이름이 들어 있지 않은가.

복수초가 눈색이꽃, 얼음새꽃인 이유는 주변 기온보다 체온이 6~7도 높기 때문이다. 복수초는 체온을 이용해 추위에 지친 벌레를 불러들인다. 벌레는 그 속에서 한참을 쉬었다가 떠나며 보답으로 꽃밥을 온몸에 묻혀 간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자연은 이렇게 서로를 돕고 도움을 받는다.

추운 겨울을 이겨냈기에 봄꽃이 아름답다는 얘기는 거짓말이다. 꽃들이 지내기에 봄은 오히려 겨울보다 혹독하다. 이른 봄꽃이 사는 계곡 북사면은 해가 짧고 나비와 벌 등 매개곤충도 귀하다. 머지않아 활엽수 잎이 하늘을 막아 햇빛을 보기도 어렵다. 봄꽃들이 혹한을 무릅쓰고 이른 꽃을 피우고 아름답게 단장해야 하는 이유다. 어떻게든 손님을 불러들여야 수정을 하고 씨방을 맺을 수 있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 진화로 이어진 것이다.

저 아래 세상은 역병이 창궐했다. 일 때문에 야생화를 보러 다니지만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하지만 폭설에 뒤덮여도 꿋꿋이 웃는 복수초도 있지 않은가. 진짜 두려움은 현실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차를 돌려 산을 내려가데 노란 복수초가 “졸지 마, 쫄지 마” 내 등짝을 세게 후려친다.

조영학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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