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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도서관, 환대의 공간

입력
2020.02.11 04:30
수정
2020.02.11 10:18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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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소설가 제이디 스미스의 말처럼 공공 도서관은 무엇인가를 구매하지 않아도 되고 구성원으로서의 다른 자격 요건도 요구하지 않는,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모든 사람을 환대하는 현대 도시 사회의 거의 유일한 시민들을 위한 실내 공공 장소인 셈이다. 사진은 미국 시애틀의 중앙 도서관 ©게티이미지뱅크
영국 소설가 제이디 스미스의 말처럼 공공 도서관은 무엇인가를 구매하지 않아도 되고 구성원으로서의 다른 자격 요건도 요구하지 않는,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모든 사람을 환대하는 현대 도시 사회의 거의 유일한 시민들을 위한 실내 공공 장소인 셈이다. 사진은 미국 시애틀의 중앙 도서관 ©게티이미지뱅크

예술 쪽 일을 하는 아내가 새로운 건물로 옮기는 공공 도서관 분관의 예술 프로젝트를 맡아 지난 몇 달간 주말도 반납하고 늦은 시간까지 스튜디오에서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12년 전 이 도시(위스콘신주 매디슨)에 처음 이사왔을 때 살던 동네에 있는 도서관이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돌이 채 되지 않은 아이를 데리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도시에 이사와 혼란스럽고 답답했을 그 시절, 동네 도서관은 아내와 아이에게 집을 나가 책도 빌리고,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 시간에도 참여하고, 무엇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고마운 공간이었다. 이런 특별한 인연 때문인지, 엄마의 부재로 아빠랑 둘이서 지내는 시간이 늘면서 아빠 잔소리에 불만이 이만저만 아닌 아이도 그런대로 잘 참아 주고 있다.

최근 갤럽 조사에 의하면 작년 한 해 미국 성인들은 평균 한 달에 한 번꼴로 도서관을 방문했다고 하는데, 반면 영화관람이나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스포츠 관람은 일 년에 대여섯 번 정도에 머물렀다. 사회학을 하는 나에게 눈에 띈 것은 여러 문화 및 여가 활동 중 도서관 방문이 거의 유일하게 저소득층의 참여가 고소득층보다 높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뉴욕대학 사회학자 클라이넨버그의 최근 저서 제목처럼 미국의 공공 도서관은 인민들의 궁전인 셈이다. 또 젊은 밀레니얼 세대의 도서관 이용도가 특별히 높은 것도 반가운 소식이다.

모든 정보가 손가락 끝에 놓여 있는 스마트폰 시대에 공공 도서관에 사람들, 그것도 디지털 시대의 원주민이라는 젊은 세대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뉴욕이나 헬싱키 같은 대도시들이 경쟁적으로 멋진 디자인의 공공 도서관 건물을 선보이는 것은 도서관이 단순히 책을 보관하고 대여해 주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미국 싱크탱크 퓨리서치센터의 조사에서 10명 중 9명의 응답자가 주민들이 시간을 보내고 사교를 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공공 도서관의 가장 중요한 기여라고 답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공공 도서관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지역 주민들에게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제공하고 지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같이 모이는 장소의 역할도 한다고 했다. 시민들을 위한 공공 공간으로서의 역할이 공공 도서관의 가장 근본적인 기능이라는 것이다. 특히 영국 소설가 제이디 스미스의 말처럼 공공 도서관은 무엇인가를 구매하지 않아도 되고 구성원으로서의 다른 자격 요건도 요구하지 않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모든 사람을 환대하는 현대 도시 사회의 거의 유일한 시민들을 위한 실내 공공 장소인 셈이다.

어느새 세금 정산을 해야 하는 계절이 돌아왔다. 사회학자의 머리가 아무리 건전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시민의 신성한 납세 의무를 되뇌어도, 그 속물스러운 마음은 지난 일 년간 낸 세금의 액수를 보고 어쩔 수 없이 속이 쓰리다. 죽음은 몰라도 세금은 별 어려움 없이 피해 가는 미국 부자들의 뉴스를 읽으면 더 그렇다.

그럴 때마다 12년 전 이 낯선 도시를 찾은 이방인 가족에게 문을 열고 환대해 준 동네 도서관을 생각한다. 그 이후로도 언제든지 만만하게 찾아가 어린 아이를 풀어 놓고 노트북을 펴 강의 준비를 하기도 하고, 아이랑 십수 권의 책을 빌려 뿌듯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기도 하고, 길고 추운 매디슨의 겨울날 도서관 벽난로 앞에 앉아 같이 만화책을 읽는 등 동네 도서관에 얽힌 즐거운 기억이 많이 있다.

그러는 사이 12년의 세월이 흘렀고 이제는 제법 이 도시가 제2의 고향 같다는 느낌이 든다. 중학생이 된 아이는 수요일마다 방과 후 친구들과 동네 도서관에서 숙제도 하고, 수다와 보드게임으로 스트레스도 풀고, 심지어 숨바꼭질을 하기도 한단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세금으로 쓰린 속이 조금은 가라앉는 느낌이다. 공공 도서관에 진 빚을 조금씩 갚는다는 생각에 말이다.

임채윤 미국 위스콘신대학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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