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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게 될 법

입력
2020.02.05 18:00
수정
2020.02.05 18:02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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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개발을 심리하는 법정의 판사들은 새만금ㆍ설악산ㆍ비자림(제주도)이 보존되든 말든 자신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서초동의 월급쟁이들이 어떻게 그곳에 살고 있는 공동체의 생사에 관여할 수 있을까. 법관들은 ‘기계적 법학’이라는 법학 용어로 잘 알려진 법실증주의와 법형식주의만을 알고 있을 뿐이며, 국가주권과 사유재산 사이의 공유자산에 대한 인식이 없다. 사진은 비자림로 확장공사 현장 전경. 김영헌 기자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개발을 심리하는 법정의 판사들은 새만금ㆍ설악산ㆍ비자림(제주도)이 보존되든 말든 자신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서초동의 월급쟁이들이 어떻게 그곳에 살고 있는 공동체의 생사에 관여할 수 있을까. 법관들은 ‘기계적 법학’이라는 법학 용어로 잘 알려진 법실증주의와 법형식주의만을 알고 있을 뿐이며, 국가주권과 사유재산 사이의 공유자산에 대한 인식이 없다. 사진은 비자림로 확장공사 현장 전경. 김영헌 기자

지금까지 쓴 칼럼을 뒤돌아보니 생태나 환경에 대해서는 열심히 쓰지 못했다. “누군가가 열심히 쓰고 있겠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지난 회에 세 번이나 연이어 쓴 내 글을 상기시키면서, “원자력 발전에 반대하는 생태주의와 당신이 꺼낸 한국의 핵무장 ‘논의’는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타박할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몇 해 전에 나는 이 지면에 이렇게 썼다. “일괄 판단이 아닌 사안별 판단을 해야 한다.”(‘내로남불’ 시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017.11.16.) 게으르고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세트 메뉴(일관성)를 시켜 먹는다.

지난해 여름에 나온 프리초프 카프라와 우고 마테이의 ‘최후의 전환’(경희대학교 출판문화원, 2019)은 최근에 나온 생태주의 관련 서적 가운데 가장 눈부신 발견을 제공하고 있으며, 생태주의 담론에 새로운 역능을 장착했다. 원제가 ‘법의 생태학(The Ecology Of Law)’인 이 책에서 지은이들은 법이 생태적 질서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법이 생태 친화적이 되어야 한다거나 환경 보호를 위해 좀 더 강력한 실정법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호소처럼 들린다. 그러나 실상은 그런 호소와 무관하거나 그 이상이다.

근대 이전의 인간은 세계를 전체론적으로 사유했다. 자연과 인간, 공동체와 개인은 따로 떨어질 수 없는 하나였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연관되어 있던 세계는 갈릴레이ㆍ데카르트ㆍ뉴턴 같은 자연과학자와 철학자가 등장하면서 분절적이고 기계론적 세계로 재설계되었고, 이에 따라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와 조정이 시작되었다. 대개의 생태주의자들이 이런 지적을 되풀이해왔지만, 지은이들이 밝히고자 한 것은 서구 역사에서 끈질기게 이어져 내려온 자연과학과 법학 간의 깊은 유사성이다.

근대 이전의 전통 사회는 사유화되지 않는 공유자산(commons)이 풍부했고, 그것은 그 지역(공동체)의 관습법에 의해 관리되고 보호되었다. 프리초프 카프라와 우고 마테이는 바로 이것을 법의 생태적 질서라고 부른다. 하지만 공동체를 우선했던 법의 생태적 질서는 중세가 끝난 16~17세기부터 해체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벌어진 인클로저(enclosure: 사전적인 뜻은 ‘울타리를 친 땅’이지만 ‘토지의 집중적인 개인 소유화’라는 역사 용어로 해석된다)가 그런 사례다. 원래 인클로저는 상류 지주 계급의 주도로 1450~1640년부터 시작되었으나, 소작농의 봉기를 두려워한 튜더 왕가에 의해 억제되었다. 그러나 명예혁명(1688~1689)으로 국왕의 권력이 유명무실해지자 의회를 장악한 상류층이 인클로저 법안을 통과시켰다. 농민들은 대대로 자유롭게 이용해온 공유지를 빼앗겼다. 이 사례는 공유자산을 효율적으로 탈취하여 사적 소유로 돌리기 위해서는 무력을 집행할 중앙집권화된 국가와 법안을 정당화해줄 기득권의 모임인 의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근대 자연과학과 철학의 영향으로 성립한 근대 법학은 국가 주권과 사유재산의 보호ㆍ확충을 목적으로 발달했다. 근대 자연과학이 자연을 침탈했듯이, 근대 법학에 근거한 법은 공동체와 공동자산을 탈취한다. 법이 이런 일을 냉혹하게 해치울 수 있는 것은 법 자체가 그만큼 생태(공동체)와 멀어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개발을 심리하는 법정의 판사들은 새만금ㆍ설악산ㆍ비자림(제주도)이 보존되든 말든 자신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서초동의 월급쟁이들이 어떻게 그곳에 살고 있는 공동체의 생사에 관여할 수 있을까. 법관들은 ‘기계적 법학’이라는 법학 용어로 잘 알려진 법실증주의와 법형식주의만을 알고 있을 뿐이며, 국가 주권과 사유재산 사이의 공유자산에 대한 인식이 없다.

지은이들은 법이 생태적 질서를 찾기 위해서는 “커먼즈를 법 전반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생태적 법의 회복은 근대성의 이념에 따라 사고의 틀이 형성된 정치가들과 법조인들이 아닌, 공공적인 것에 밀착한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이룩될 것이라고 말한다. 생태적 법의 회복이라는 점에서 주민투표는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 이번 회로 연재를 마칩니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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