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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본다, SF] SF의 미학은 경이감이 아닌 분노에서 나온다

입력
2020.01.24 09:0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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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소설(SF)을 문학으로, 과학으로, 때로 사회로 읽고 소개하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지식큐레이터(YG와 JYP의 책걸상 팟캐스트 진행자) 강양구씨가 ‘한국일보’에 격주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24> 필립 K. 딕 ‘유빅’

핸슨 로보틱스사가 제작한 20세기 SF소설의 거장 필립 K. 딕 로봇. 인간의 마음을 가진 로봇을 만들겠다는 창업자 데이비드 핸슨의 아이디어는 어릴 적 딕의 작품을 읽고 품은 꿈이었다. 핸슨 로보틱스사 제공
핸슨 로보틱스사가 제작한 20세기 SF소설의 거장 필립 K. 딕 로봇. 인간의 마음을 가진 로봇을 만들겠다는 창업자 데이비드 핸슨의 아이디어는 어릴 적 딕의 작품을 읽고 품은 꿈이었다. 핸슨 로보틱스사 제공

“많은 응모작에 분노가 담겨 있었다. (…) SF의 미학은 분노가 아니라 경이감에 있다. 애초 분노는 SF에서 가장 잘 다뤄질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어떤 작품이 전하는 가장 강렬한 감정이 분노라면, 이는 작가가 장르를 잘못 선택한 것이다. (…) SF라는 장르를 이해하고, 당신의 글을 읽는 독자를 존중하라. 창작은 화풀이의 도구가 아니고 독자는 화풀이의 상대가 아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김초엽을 세상에 알린 국내 SF 문학상의 한 심사위원 소감을 읽었다. 대부분 동의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한 가지 결정적인 부분에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SF의 미학이 과연 ‘경이감’일까. 알다시피, ‘경이감’은 “놀랍고 신기한 느낌”이다. 많은 독자가 “놀랍고 신기한 느낌” 때문에 김초엽의 소설에 열광했던 것일까.

한 팟캐스트에서 김초엽의 단편 몇 편을 소개했더니, 한 애청자가 SF의 거장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필립 K. 딕의 ‘유빅’(폴라북스 펴냄)을 언급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 K. 딕이 1969년 발표한 ‘유빅’에는 사람이 죽고 나서도 의식만을 유지하게 해서 살아있는 사람, 예를 들어 가족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하는 서비스가 나온다.

그렇다. 김초엽의 단편 가운데 ‘관내 분실’의 설정과 흡사하다. 죽은 사람의 기억을 갈무리해서 도서관처럼 보관하는 서비스가 시작되고, 남은 이들은 그 죽은 사람의 흔적(마인드)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임신을 하고 나서도 ‘모성애’보다는 스트레스가 치솟는 주인공은 뒤늦게 어머니의 마인드와 대면하려 하지만, 그녀의 마인드는 어디론지 사라졌다.(관내 분실)

20세기 SF소설의 손꼽히는 거장 필립 K. 딕. 한국일보 자료사진
20세기 SF소설의 손꼽히는 거장 필립 K. 딕. 한국일보 자료사진

사실 이런 설정은 최근에 나온 다른 소설에서도 반복된다. ‘노인의 전쟁’으로 유명한 존 스칼지가 새로운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서 펴내고 있는 ‘상호 의존 성단’ 3부작(현재까지 ‘무너지는 제국’, ‘타오르는 화염’이 나왔고, ‘마지막 황제’가 나올 예정이다)에서는 우주 어느 곳에 자리 잡은 우주 제국이 배경이다.

이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의 기억과 언행은 고스란히 기록돼 보관된다. 후대의 황제는 고민거리가 있을 때마다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보관소로 들어가서 과거 황제의 ‘마인드’를 호출해 대화를 나눈다. 어떤가. 필립 K. 딕, 존 스칼지, 김초엽은 수십 년의 시간차를 두고서 비슷한 과학기술(?) 설정을 변주해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설정 위에 그려진 이야기는 유사점이 전혀 없다.

SF 장르는 과학기술에 기반을 둔 상상력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런 특성 때문에 여러 오해가 발생한다. 어떤 답답한 사람은 ‘지금 여기의’ 과학기술 지식에 근거한 SF를 고집한다. 하지만 흔히 최초의 SF 작가로 꼽히는 메리 셸리(‘프랑켄슈타인’)부터 쥘 베른, 필립 K. 딕, 존 스칼지, 김초엽 등은 모두 당대의 과학기술 지식에 속박당하지 않은 상상력으로 독자에게 즐거움을 줬다.

앞에서 언급한 SF의 ‘고유한’ 미학이 “경이감”이라는 정의도 과학기술을 아주 좁게 이해하는 데서 비롯된다. 미지의 것을 발견하거나 발명할 때의 경이감은 과학기술이 줄 수 있는 중요한 감정이다. 하지만 마치 근대 과학 혁명의 시기부터 과학기술에 덧붙여져서 이야기해온 이런 ‘낭만적’ 감정을 지금도 되뇌는 일은 낡았다.

유빅

필립 K. 딕 지음ㆍ김상훈 옮김

폴라북스 발행ㆍ400쪽ㆍ1만4,000원

알다시피, 지금의 과학기술은 삶을 구석구석 좌지우지하는 실체다. 탄생부터 죽음, 우리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생산(업무)-교통-통신-행정-금융-감시 시스템까지 과학기술과 무관한 것은 없다. 이렇게 삶 그 자체가 과학기술과 겹치다 보니, 과학기술에 기반을 둔 상상력은 곧 지금 여기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수렴된다.

그러니 지금처럼 분노할 일이 많은 답답한 현실에서 SF를 창작하는 신진 작가가 ‘경이’ 대신에 ‘분노’를 이야기하는 일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좋은 SF는 현실의 삶을 지배하고 제한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려는 상상력을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또 그런 ‘분노’는 지금과 다른 삶을 상상하도록 자극한다. 필립 K. 딕, 김초엽의 작품이야말로 그 증거다.

SF 초심자 권유 지수 : ★★★★. (별 다섯 개 만점)강양구 지식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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