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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메리언 앤더슨의 뉴욕 입성(1.7)

입력
2020.01.07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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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의 장벽을 극적으로 허문 성악가 메리언 앤더슨이 1955년 오늘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무대에 섰다. 미국 의회도서관 사진.
인종차별의 장벽을 극적으로 허문 성악가 메리언 앤더슨이 1955년 오늘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무대에 섰다. 미국 의회도서관 사진.

흑인 여성 성악가 메리언 앤더슨(Marian Anderson, 1897~1993)은 미국 역사를 통틀어 인종 차별 장벽을 가장 극적으로 허문 예술가라 할 만하다. 그는 1955년 1월 7일, 흑인 성악가로는 최초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무대에 섰다. 57세의 그는 베르디 오페라 ‘가면무도회’의 엑스트라(점쟁이 울리카 역)로 무대에 올랐지만, 거시적으로 그 무대는 차별주의자들이 그에게 항복 문서를 바치는 자리였다. 불과 몇 달 뒤 미 연방대법원은 브라운 판결로 교육 인종차별을 불법화했고, 그해 말 로자 파크스가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을 시작했다.

필라델피아 한 빈민가 세 아이 중 장녀로 태어난 앤더슨은 독실한 기독교인(연합침례교)이던 부모의 영향으로 6세 무렵부터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했다. 그의 노래는 단연 발군이어서 지역 교회와 YMCA 등이 자선공연을 할 때마다 그를 초빙할 정도였다. 앤더슨이 12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숨지면서 가족은 친조부 집에 얹혀 살아야 했다. 고교 졸업 후 전원 백인인 필라델피아 음악아카데미에 지원했지만, 흑인이어서 탈락했다. 16세 무렵 지역 교구민들이 돈을 모금해 그에게 발성 공부를 시켰다.

그는 1925년 뉴욕 필하모니 콩쿠르에서 입상한 뒤 협연했고, 28년 카네기홀 무대에도 섰다. 줄리어스 로젠발트 장학금으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지에 유학하면서 그는 ‘영혼으로 노래하는 콘트랄토’라는 평을 들으며 1935년 흑인 성악가로는 최초로 잘츠부르크 국제페스티벌 무대에 섰고, 공연 직후 거장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로부터 “100년 만에 한 번 들을까 말까 한 목소리”란 극찬을 듣기도 했다. 훗날 일이지만 74년 그가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의 핀란드 자택에서 노래하자 시벨리우스가 감동에 겨운 나머지 그에게 다가가 “내 집 지붕이 당신에겐 너무 낮다”며 그를 껴안았다고 한다.

19세기 미국 흑인 예술가들은 흔히 고국보다 유럽에서 먼저 인정받고 환대받았다. 앤더슨도 마찬가지였다. 유럽 각국에서 116회에 달하는 순회 공연을 펼친 그였지만, 1939년 워싱턴 D.C의 DAR 컨스티투션 홀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예정된 그의 공연을 돌연 취소했다. 그는 보란 듯이 링컨기념관 광장에서 무료 공연을 펼쳐 7만5,000여 관중을 매료시켰다. 그는 영화 ‘그린북’의 실제 모델인 흑인 피아니스트 도널드 셜리(Donald Shirley, 1927~2013)보다 30년 앞선 시절을 살았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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