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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한낮의 어느 승부

입력
2019.12.09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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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크라쉬 경기./2019-12-08(한국일보)
2018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크라쉬 경기./2019-12-08(한국일보)

지방의 한 대학교 체육관에서 국제 크라쉬 경기를 보고 있었다. 나는 어쩌다 궁금해서 와 보았고, 평일 낮 경기장은 한산했다. 크라쉬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시작된 무예로, 5분 이내에 서로의 옷깃을 잡아 상대를 넘어뜨리는 경기다. '크라쉬'는 우즈베키스탄어로 승부라는 뜻이다. 심판이 “크라쉬”를 외치자마자 선수들은 서로 옷깃을 붙들며 상대방을 넘어뜨리려 했다. 객석에는 중앙아시아계로 보이는 선수와 코치가 누워서 쉬거나 준비운동을 하고 있었다.

경기는 토너먼트식으로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한 번 지면 끝나는 경기였다. 첫판부터 패배한다면 이 사람들 앞에서 한 번 눕기 위해 여기까지 오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눈길을 끄는 무제한급 경기가 하나 있었다. 대단한 거구의 선수와 그럭저럭 커다란 선수가 붙었기 때문이었다. 체격 차이가 한눈에 보기에도 너무 확연해 승부가 뻔해 보였다. 무제한급 선수층이 얇아서 둘은 어쩔 수 없이 경기를 해야 하는 것으로 보였다. 저런 것도 일종의 불평등인가. 그리하여 절대 이기지 못할 선수와 맞서기 위해 한국의 지방 도시까지 와야 하는 선수라.

하지만 몸집이 작은 선수는 큰 선수를 이기기 위해 나름대로 대단한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다. 심판이 자세를 가다듬어도 꿈틀대며 큰 몸집에 맞서 유리한 위치와 자세를 선점하려고 했다. 저렇게라도 해야지 여기까지 날아온 보람이 있을 것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혹시 전략을 잘 세워서 체격의 열세를 역전하거나 끈기 있게 버텨서 승리를 쟁취하는 법이 있지 않을까.

심판은 일순간 손을 들고 “크라쉬”를 외쳤다. 동시에 몸집이 큰 선수는 몸집이 작은 선수의 다리를 걸어 집어던졌다. 너무 순리대로 깔끔하게 날아가서 승부에 이견이 없을 정도였다. 크라쉬 교과서가 있다면 방금 장면을 녹화해서 보여주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심판진은 즉시 승리를 선언하지 않았다. 궁금해서 연유를 지켜보니 외침과 동시에 집어던진 게 문제였던 것 같았다. 외침보다 공격이 먼저 시작되었는지가 쟁점이었다.

심판진은 논의에 들어갔다. 관객도 그들이 고민하는 영상을 볼 수 있었다. 화면은 손이 올라간 순간과 몸집이 큰 선수가 집어던지는 타이밍을 느린 그림으로 보여주었다. 애매하게 먼저 집어던진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심판진은 대기심까지도 불러 모았다. 그들에겐 대단한 난제인 것 같았다. 심판은 본분상 어떠한 외부 요인과는 관계없이 공정한 판정을 내려야만 한다. 그것이 불평등한 승부에서 다른 한 번의 기회가 될 수 있겠다는 뻔한 생각을 할 동안에도 그들은 계속 회의를 했다.

지지부진한 장고 끝에 결국 반칙이 선언됐다. 재경기였다. 둘은 다시 경기장으로 나왔다. 몸집이 큰 선수는 가만히 옷깃을 잡고 있었다. 몸집이 작은 선수는 한 번 공격을 당해보았으므로 그 방식을 처음부터 방어하는 것으로 보였다. 최대한 힘을 모으고 어깨를 좋은 자세로 넣었고, 방금 공격이 들어왔던 다리 부근을 오므리고 있었다. 조금 유리해진 걸까. 재대결이 매우 흥미로웠다. 전략이 들통났으니 작은 선수가 방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승부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것 같았다. 심판은 이번에도 두 선수의 자세를 교정하다가, 허공에 손을 들고 “크라쉬”를 외쳤다.

몸집이 큰 선수는 정확히 1초를 기다렸다. 4분 59초가 남았다. 이윽고 몸집이 큰 선수는 아까와 똑같은 방식으로 몸집이 작은 선수의 다리를 걸어 집어던졌다. 한 번 해보았던 공격이어서 그런지, 몸집이 작은 선수는 더욱 능숙한 방식으로 깔끔하고도 아름답게 날아갔다. 아까 슬로 모션으로 보았던 교과서가 그대로 재생되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심판의 손이 주저 없이 올라갔다. 완벽한 승부는 1초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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