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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칼럼] 단식 정치가 ‘신의 한 수’ 되려면

입력
2019.11.28 18:00
수정
2019.11.29 10:09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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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결단 8일 만에 의식 잃어 병원행

당 안팎 잡음 삭히고 리더십 위기 탈출

연동제 협상은 약속…책임 있는 결론 내야

청와대 앞에서 패스트트랙 법안 철회를 요구하며 8일째 단식 농성하던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27일 밤 의식을 잃어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고 있다. 자유한국당 제공
청와대 앞에서 패스트트랙 법안 철회를 요구하며 8일째 단식 농성하던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27일 밤 의식을 잃어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고 있다. 자유한국당 제공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청와대 앞 단식투쟁을 놓고 ‘신의 한 수’라는 평가가 심심찮게 나돌고 있다. “양심을 가진 정치인”으로서 정권의 독선과 독주를 두고볼 수 없어 ‘죽기를 각오하고’ 단식하다 8일 만에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이송된 사건을 정치공학적 틀로 해석한 얘기지만 그런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조국 정국’ 동력을 보수 통합과 외연 확장 의제로 이어가려던 계획이 차질을 빚던 차에 박찬주 전 육군대장 영입 무산 소동으로 당 안팎의 인적 쇄신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리더십 위기에 몰리다가 일거에 이 상황을 뒤집었으니 말이다. 여권은 ‘떼쓰기 꼼수’ 라고 폄하하지만 황의 승부수가 몰고온 돌풍 앞에서 당내 반대파와 쇄신파의 ‘투항’도 잇따르고 있다.

가장 큰 성과는 종착역을 향해 달리던 국회 패스트트랙 열차에 제동을 걸고 소속 의원들을 패스트트랙 저지 결사항전 전선으로 내몬 것이다. 특히 “정권과 야합 세력의 국회 장악 및 개헌선 확보 시도”라고 규정했던 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법 개정안은 엊그제 본회의에 자동 부의됐지만 그의 단식투쟁과 병원 이송 여파로 앞날을 기약하기 어렵게 됐다.

물론 황 대표나 한국당의 뜻대로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여권은 단식 카드의 파장을 곤혹스러워하면서도 내년 4ㆍ15 총선 예비후보 등록이 시작되는 내달 17일 이전에는 게임의 룰을 정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물러설 생각이 없다. 한국당의 협상 참여를 압박하기 위해 이른바 ‘4+1 공조체제’도 가동했다. 그러나 향후 선거법 등 패스트트랙 법안이 어떤 운명에 처하든, 황 대표는 “야당 리더로서 할 만큼 했고 최선을 다했다”는 후한 평가를 확보한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의원직 총사퇴 등 강경투쟁 목소리가 커지는 것에 비례해 황대표의 높아진 위상에 기초한 협상론이 머리를 드는 점이다.

잃은 것도 적지 않다. 첫째는 올 4월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연동형 선거법 개정안의 전후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황 대표가 선악 이분법의 공안검사적 시각으로 대처해 ‘정치 선무당’ 꼬리표를 자초한 것이다. 이 개혁안은 지난해 12월 초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와 이정미 전 정의당 대표의 9일 단식이 이끌어낸 것이다.

당시 민주당과 한국당의 외면 속에 70대 고령인 손 대표 등의 단식이 10일을 넘길 경우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자 문희상 국회의장이 바쁘게 움직였다. 청와대에 긴급 면담을 신청해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대통령이 여당에 연동제 지론을 밝혀 달라”고 요청하고 나경원 원내대표에게도 도움을 구했다. 그 결과가 이른바 연동형 도입 원칙과 의원정수 확대 검토를 골자로 하는 6개항 합의가 이루어졌다. 합의 문구의 해석을 놓고 논란이 있었지만 연동제 선거법 개정 필요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대세가 됐다.

지난 10일 청와대 5당 대표 회동에서 황 대표가 고교 11년 선배인 손 대표와 얼굴을 붉히는 언쟁을 벌인 것은 올 3월 취임한 황 대표가 이 같은 사정을 잘 모른 탓이다. 합의 정신과 반대로 비례대표를 아예 없애는 방안을 당론이라고 고집하는 황 대표에게 손 대표가 “정치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일침을 놓은 것도 무리가 아니다. 어쨌든 손 대표 등이 정치 개혁의 대의와 단식을 앞세워 끌어낸 합의를 무산시키겠다며 또 다른 단식을 무기로 들고나온 황 대표와 한국당의 행태는 정치 도의나 신의성실의 원칙에도 맞지 않는다.

청와대를 향한 황 대표의 요구는 번지수를 잘못 찾은 실착이다. 문 대통령이 ‘2015년 중앙선관위 안에 기초한 비례성 강화 선거제 합의’를 지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주체는 국회라고 못 박았다. 대통령이 선뜻 나설 수 없는 조건을 들이대면서 답이 없다고 “비정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책임과 소명의 결단으로 시작한 황 대표의 단식투쟁은 과소 평가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과녁을 잘못 설정하면 약효가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때마다 같은 카드를 꺼낼 순 없다. 그렇다면 황 대표가 리더십을 회복한 ‘지금 여기’를 신의 한 수로 만드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정치는 대결을 앞세워 최선과 최악을 널뛰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우선하며 차선과 차악 사이에서 해법을 찾는 예술이다. 황 대표의 쾌유를 빈다.

논설고문 jtino5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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