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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시행령으로 버티려는 정부

입력
2019.11.24 18: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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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 위반이거나 우회, 편법의 소지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일 반복되면

어둠과 법치의 세계, 구분할 수 없어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18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주52시간제 보완대책으로 시행규칙을 개정해 가능한 범위 내에서 특별연장근로 인가 사유를 최대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뉴스1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18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주52시간제 보완대책으로 시행규칙을 개정해 가능한 범위 내에서 특별연장근로 인가 사유를 최대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뉴스1

문재인 정부는 유난히 시행령에 목을 맨다. 국회 통과가 어려운 정책을 추진하다 보니 시행령이나 시행규칙 개정으로 버티려는 것이다. 시행령은 대통령, 시행규칙은 총리나 장관이 제정 공포하면 되니 국회를 거치지 않고 정부 내에서 가능하다. 국회의 시간과 능력 결여, 경제 사정 변경 등의 이유로 법률에 모든 사항을 규정할 수 없으므로 법률을 시행하는 데 필요한 상세한 세부 규정은 시행령이나 시행규칙에 담는다. 따라서 법률에서 정해야 할 굵직한 사안을 헌법과 법률의 테두리를 넘어가는 시행령이나 시행규칙에서 정하는 것은 헌법이나 법률 위반소지가 있다. 우회나 편법의 의혹을 받는 것으로, 꼬리가 몸통을 흔들 수 있다는 얘기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주 52시간 근로제에 대한 보완 조치도 한 사례다. 정부는 법률상 내년 1월 1일부터 확대 적용하기로 되어 있는 주 52시간 근로제에 대해 계도기간을 부여하고 특별연장 근로 요건을 완화하겠다고 했다. 계도기간 부여는 법 적용을 일정 기간 중단하는 조치고, 특별연장 근로 요건 완화는 시행규칙 개정이 필요하다. 현재 시행규칙은 ‘재난 및 이에 준하는 사고 발생시’에만 특별연장 근로 인가를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시행규칙을 고쳐 일시적인 업무량 급증 등 경영상의 사유에 대해서도 특별연장 근로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법 개정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국회에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고육지책이라도 정부가 법률을 일시 무력화하거나, 법 시행 의지가 미약하다는 반증이다.

유사한 사례가 또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재벌기업의 경제력 집중 방지를 목적으로 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 통과가 야당의 반대로 여의치 않자 연말까지 시행령 개정을 통해 우회 돌파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야당에서는 개정 시행령의 내용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큰 것들로 법률로 다뤄야 할 사안인데도 공정위가 성과를 내기 위해 무리를 한다고 비판한다.

교육부가 이달 초 발표한 고교서열화 해소 방안도 시행령 개정이 전제되어 있다. 2025년까지 자율형사립고ㆍ외국어고ㆍ국제고를 일반고로 일괄 전환하는 것이다. 교육부는 재지정 평가를 통해 설립 취지를 벗어난 학교를 단계적으로 전환하려 했으나 재지정에서 탈락한 학교들이 무더기로 소송을 내면서 일반고 전환정책이 난관에 부딪히자 아예 시행령을 고치겠다는 것이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에 명시된 자사고ㆍ외국어고ㆍ국제고의 설립 근거를 삭제하는 것은 간단한 작업이다. 공청회 등의 여론 수렴 작업도 필요 없고 정부 의지만으로 가능하다. 이 바람에 강남 집값까지 들썩거린다. 하지만 다음 정권이 이를 다시 부활시키면 도루묵이 된다. 이처럼 중요한 교육 문제가 법률이 아닌 시행령에 규정된 것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법무부도 검찰총장의 중요 사건 수사단계별 장관 보고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검찰보고 사무규칙안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개정 규칙안은 법무부 장관이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검찰총장만을 지휘 감독할 수 있다는 검찰청법을 위배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무리 급해도 검찰 개혁의 핵심 문제를 법이 아닌 규칙 개정으로 밀어붙이려는 것은 정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유혹이 많을 것이다. 정책 추진 의지는 강하지만 야당 반대가 심하니 우회로를 뚫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버텨서는 정책이 힘을 받을 수 없고 오래 지속될 수도 없다. 급할수록 정공법으로 돌아가는 것이 옳다. 이미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추락한 지 오래다. 공자는 “먼저 무기를 버리고, 그다음에 음식을 버려라. 그러나 신뢰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폐기 카드를 꺼냈다가 접은 것도 국민과 동맹의 신뢰만 잃은 사례다.

오래전 ‘내 발이 법이다’라는 허름한 영화가 있었다. 어둠의 세계는 힘 센 사람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내용이다. ‘정의는 권력의 편’이라는 말의 ‘어둠의 버전’일 것이다. 시행령이 법률을 능멸하는 일이 반복되면 어둠의 세계나 법치의 세계나 다를 것이 없다.

조재우 논설위원 josus6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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