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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 못 와도 좋으니 전시회엔 꼭 오렴” 7080 어르신들 ‘행복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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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 못 와도 좋으니 전시회엔 꼭 오렴” 7080 어르신들 ‘행복전시회’

입력
2019.11.19 04:40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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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한국일보]지난 16일 제주도 2청사 로비에서는 생전 처음 붓을 잡아본 70, 80대 어르신들이 각자의 인생을 화폭에 담아 선보이는 ‘행복전시회’ 개막식이 열렸다. 사진은 이번 전시회에서 그림을 출품한 이정자, 신동욱, 문종수, 이영자, 박연금, 김양희, 방정화씨(뒷줄 왼쪽부터). 김영헌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지난 16일 제주도 2청사 로비에서는 생전 처음 붓을 잡아본 70, 80대 어르신들이 각자의 인생을 화폭에 담아 선보이는 ‘행복전시회’ 개막식이 열렸다. 사진은 이번 전시회에서 그림을 출품한 이정자, 신동욱, 문종수, 이영자, 박연금, 김양희, 방정화씨(뒷줄 왼쪽부터). 김영헌 기자.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손녀, 손자, 친구들아! 내 장례식에는 오지 않아도 좋으니 전시회에서 얼굴 좀 보자!”

생전 처음 붓을 잡아본 70, 80대 어르신들이 각자의 인생을 화폭에 담아 선보이는 첫 전시회의 팸플릿에 쓴 초대의 글이다. 부조금을 들고 형식적으로 찾아오는 장례식을 끝으로 기억에서 사라지는 대신 누구에게도 속 시원하게 털어놓지 못했던 자신들의 삶을 생전에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뜻이다.

지난 16일 제주도 2청사 로비에서 진행된 ‘행복전시회’ 개막식에서 8명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자신들의 바람처럼 가족들에게 둘러 쌓인 채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이번 전시는 어르신들의 인생을 그림으로 담는 작업을 통해 부모 세대들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 ㈔사람과 사람들이 기획했다. 이 단체는 ‘문화로 사회에 봉사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된 비영리단체다.

전시회에는 미술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총 9주에 걸쳐 완성된 작품 30여 점이 전시됐다. 전시에 참여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평생 그림 한 번 그려본 적이 없었기에, 짧은 시간에 배운 실력으로 그린 그림은 뛰어난 작품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림에 담긴 어르신들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은, 보는 이들에게 그 어떤 명화보다 더 큰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저작권 한국일보]지난 16일 제주도 2청사 로비에서는 생전 처음 붓을 잡아본 70, 80대 어르신들이 각자의 인생을 화폭에 담아 선보이는 ‘행복전시회’ 개막식이 열렸다. 사진은 이번 전시회에서 그림을 출품한 할머니, 할아버지와 전시회를 찾은 가족들, 전시회를 준비한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김영헌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지난 16일 제주도 2청사 로비에서는 생전 처음 붓을 잡아본 70, 80대 어르신들이 각자의 인생을 화폭에 담아 선보이는 ‘행복전시회’ 개막식이 열렸다. 사진은 이번 전시회에서 그림을 출품한 할머니, 할아버지와 전시회를 찾은 가족들, 전시회를 준비한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김영헌 기자.

3년 전 남편과 여행을 왔다가 제주에 정착한 방정화(75) 할머니는 가장 행복한 순간을 그림을 그리는 자신과 큰 딸로 택했다. 3년 전 파킨스병에 걸려 관절이 굳고 근육이 약화돼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지만, 붓을 잡은 손에는 알 수 없는 힘이 생겼다. ‘내 사랑 큰딸’ 은 선 하나 하나에 딸에 대한 사랑이 듬뿍 담겨 있었고, ‘화가를 꿈꾸며’는 그림을 그리는 그의 얼굴에 즐겁고 행복한 감정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었다.

어머니의 작품을 보던 방씨의 큰딸 김에리샤(50)씨는 “어릴 때 새나 꽃그림을 그려주신 적이 있다. 옛날부터 손재주는 좋으셨다”며 “하지만 아프셔서 손도 잘 움직이지 못하시는데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릴 줄은 몰랐다. 뿌듯하고 너무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평생에서 가장 잘 한 일로 결혼을 위해 처갓집에서 가서 세 번이나 시험을 본 것이라는 문종수(89) 할아버지는 그 기억을 ‘결혼시험’으로 그려냈다. 문 할아버지와 함께 이번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부인 김양희(87) 할머니는 이날 “가끔 속도 섞였지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남편”이라고 말하면서 돈독한 부부 금슬을 자랑했다.

박연금(74) 할머니는 일곱 번 이사 끝에 어렵게 돈을 모아 마련한 첫 집을 화폭에 담은 ‘우성아파트의 추억’을 전시했다. 박 할머니는 집이 생겼다는 기쁨도 컸지만, 그 곳에서 만난 이웃들과의 추억들이 너무 좋았다고 회상했다.

이외에도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동네가 자신이 사는 호근리라는 이정자(77) 할머니의 ‘우리동네 호근리’, 괴로운 일도 있었지만 억척스럽고 치열하게 살았던 30대가 인생 최고의 시절이라는 이영자(79) 할머니의 ‘아! 나의 30대’ 등 다른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일이었지만 자신에게는 가장 행복한 순간을 그림에 담아냈다.

방정화 할머니의 '화가를 꿈꾸며'.
방정화 할머니의 '화가를 꿈꾸며'.
박연금 할머니의 '우성아파트의 추억'.
박연금 할머니의 '우성아파트의 추억'.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기억 속에서 행복을 꺼내는 일이었다. 예상과 달리 어르신들은 오래 전에 있었던 일들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하지만 세월의 흔적 속에서 행복한 순간도 있었지만 기억하기 싫은 슬픔도 함께 있었다. 이 때문에 이번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15명의 어르신들 중 7명은 도중에 포기했다.

전시 기획을 맡은 강홍림 ㈔사람과 사람들 이사장은 “이번 프로그램에 참가한 어르신들은 예상과 달리 아크릴 물감으로 캔버스에 칠을 할 때 망설임이 없었다”며 “아마도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숱한 경험을 하셨기에 그림 그리는 것쯤이야 연륜 앞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옛날 기억을 꺼내는 과정에서 아픈 기억들도 마주하게 되면서 중간에 하차하게 된 어르신들이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라며 “앞으로 더 많은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이정자 할머니의 '우리동네 호근리'.
이정자 할머니의 '우리동네 호근리'.

제주=김영헌 기자 taml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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