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2030 세상보기] 휠체어와 유아차

입력
2019.11.02 04:40
26면
0 0
결국 장애인 이동권의 보장은 장애인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나 같은 환자, 어린 아이, 노인, 나아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결국 장애인 이동권의 보장은 장애인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나 같은 환자, 어린 아이, 노인, 나아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누구나 그렇듯이 큰일을 겪으면 시야가 달라진다. 사마천은 소중한 것을 잃자 역사를 바라보았으며, 도스토옙스키는 도박 빚으로 가산을 탕진하고서야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마찬가지로 낙상 등으로 발을 크게 다치면 당장의 걸음걸이가 불가능하고 몸을 씻거나 옷을 차려 입는 일조차 어려워지기 때문에,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크게 달라진다.

사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깨달았다. 휠체어에 타고 도착한 첫 번째 편의점은 턱이 너무 높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두 번째 편의점은 문을 여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입구에 놓인 우산과 신문 판매대와 호빵 기계에 가로막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세 번째 편의점은 드디어 들어갈 수 있었으나 상품 매대와 매대 사이의 폭이 좁아 지나갈 수가 없었다. 다른 가게들도 마찬가지였다. 카페나 식당, 아이스크림 가게, 심지어 약국마저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접근조차 어렵거나, 겨우 들어간다고 해도 장애물이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평소 타고 다니던 버스 중에 휠체어에 탄 채로 들어갈 수 있는 버스는 단 한 대도 없었다. 저상버스는 모든 노선에 마련돼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축을 받아 가까스로 탑승한 버스 안에서 휠체어 표시가 그려진 교통약자석을 발견해도 놀라지 않았다. 어느 멀티플렉스 영화관은 매표소가 있는 층과 상영관이 있는 층이 분리돼 있었다. 그 두 층 사이는 엘리베이터가 아닌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으로만 연결돼 있었는데, 역시 부축을 받아야만 올라갈 수 있는 상영관에서 휠체어 표시가 그려진 좌석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저 규정에 따라 그렇게 돼 있을 따름이었다.

연달아 세 대의 택시가 탑승을 거절했다. 접이식 휠체어를 싣기에는 LPG 연료통이 들어앉은 트렁크가 너무 비좁았다. 지하철역에서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엘리베이터 위치를 표시한 주변 지도는 저 계단 아래, 휠체어로는 갈 수 없는 곳에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음으로써 겨우 지하철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역은 휠체어를 타고는 7호선에서 4호선으로 환승할 방법이 없었다. 별 수 없이 바깥으로 나가서 다른 입구를 통해 교통카드를 다시 찍고 들어와야 했다.

서울시립미술관 분관에 갔다. 입구의 경사로가 넓고 완만했다. 실내에서는 편평한 바닥면 위로 바퀴가 달콤하게 움직였다. 각 층을 쾌적한 엘리베이터로 이동할 수 있었다. 화장실 앞에 설치된 고정 벤치가 휠체어를 가로막았지만, 그럼에도 가본 곳 중 가장 좋은 문화공간이었다. 경기도 별내에 있는 공립 축구장에 갔다. 훌륭한 잔디밭이 깔려 있었다. 시민들을 위한 여러 시설들이 자태를 뽐냈다. 스물 네 칸의 가파른 나무 계단 위에 있는 화장실에 휠체어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훌륭한 체육공원이었다. 왜냐하면 그곳들은 휠체어의 접근을 막음으로써, 청소도구로 가득 찬 여느 휠체어용 화장실에서 받는 감정을 전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깨달았다. 휠체어에 탄 사람을 거리에서 쉽게 보지 못하는 것처럼, 유아차에 아이를 태운 사람 또한 드물게 볼 수 있을 뿐이다. 휠체어가 다니기 힘든 곳은 유아차도 지나가기 어렵다. 보행기에 의지하는 노인들 또한 그렇다. 민간 상점 태반은 출입조차 쉽지 않고, 공공시설은 세심한 고려가 부족하다. 교통 인프라가 도시를 촘촘히 채워도 이동은 역시 어렵다. 결국 가족이나 친구가 운전하는 차가 없으면 외출을 꺼리게 된다.

결국 장애인 이동권의 보장은 장애인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나 같은 환자, 어린 아이, 노인, 나아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노부모를 모시고 아이를 데리고 외출하려면 으레 큰 마음을 먹어야 한다. 휠체어 이용자가 각종 시설과 교통수단을 편히 이용할 수 있게끔 하면 누구든지 자가용 차량 없이도 가족과 멀리 외출할 수 있게 된다.

손이상 문화운동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