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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석학 칼럼] 칼끝에 선 민주주의

입력
2019.10.28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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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탄생시키는 주요 수단인 ‘정치적 합의’는 협상 과정에서 시민권의 혜택이 가장 절실한 소수자를 배제하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 소수자들은 엘리트처럼 자원을 보유하지도 못했고, 다수파가 지닌 수적 우위도 없다. 따라서 엘리트와 다수파의 정치적 합의는 리버럴 민주주의보다, 선거 민주주의라고 하는 빈약한 민주주의를 선호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민주주의를 탄생시키는 주요 수단인 ‘정치적 합의’는 협상 과정에서 시민권의 혜택이 가장 절실한 소수자를 배제하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 소수자들은 엘리트처럼 자원을 보유하지도 못했고, 다수파가 지닌 수적 우위도 없다. 따라서 엘리트와 다수파의 정치적 합의는 리버럴 민주주의보다, 선거 민주주의라고 하는 빈약한 민주주의를 선호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모하메드 하니프의 소설 ‘빨간새’에 등장하는 미국 폭격기 조종사는 아라비아 사막에 추락하고 근처 난민캠프에서 옴짝달싹 못 하는 신세가 된다. 그는 현지 가게 주인과 도둑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미국 정부야말로 제일 큰 도둑이야, 산 사람도 털고 죽은 사람도 털거든”이라고 한다. 주인은 이렇게 답한다. “다행이네. 여긴 그런 문제는 없어. 서로가 서로에게서 훔칠 뿐이니까.”

이 장면에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공저자인 대런 애스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의 신간 ‘좁은 회랑-국가, 사회 그리고 자유의 운명’의 주된 논지가 요약돼 있다. 저자들은 자유와 번영에 대한 전망은 정부 억압과 사회 내부에서 벌어지는 불법과 폭력 사이의 칼끝처럼 날카로운 선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잡고 있다고 말한다. 정부가 과도하게 사회에 대한 지배권을 갖게 되면 폭정이 되고 반대로 사회보다 약하면 무정부 상태가 된다.

두 디스토피아 사이엔 ‘좁은 회랑’이 있으며 산업화한 소수 국가만이 그 좁고 가느다란 궤도를 찾아냈다. 그 길에 들어섰더라도 계속해 있을 수 있는지도 미지수다. 저자들은 시민사회가 경계를 늦추거나 미래에 출현할지 모를 독재자들에게 대항할 수 없게 되면, 권위주의가 언제든 되돌아올 수 있다고 강조한다.

‘좁은 회랑’은 이전 베스트셀러인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를 토대로 쓰였다. 그 책과 다른 글에서 저자들은 ‘포용적인 제도’를 경제ㆍ정치적 진보를 이끄는 중요한 조정자로 보고 있다. 포용적 제도는 재산권 안전과 법의 지배의 혜택에 모든 시민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며, 소수 엘리트 그룹에 특혜를 주지 않는다.

애스모글루와 로빈슨이 정립한 이 명제가 잘 적용되지 않는 국가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에서는 공산당의 정권 독점, 부패 만연, 경제 분야 경쟁자나 정치적 반대파의 재산을 쉽게 몰수하는 등 포용적 제도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도 지난 40년 동안 중국 정권은 전례 없는 경제 성장과 가장 인상적인 빈곤 감소를 달성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는 착취적 정치 제도가 포용적 제도로 바뀌지 않는 한, 중국의 경제 성장은 멈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좁은 회랑’에서 이 논지를 더욱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중국을 거의 2,500년 동안 강력한 정부가 사회를 지배한 나라로 특징짓는다. 저자들에 의하면, 중국은 오랜 기간 ‘회랑’ 밖에 있었기 때문에 순조롭게 ‘회랑’에 들어설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본다. 결국 더 이상의 정치 개혁이나 빠른 경제 성장은 없을 것이란 결론이다.

저자들의 명제와 공존이 불안해 보이는 또 다른 대국이 바로 미국이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출간 당시, 많은 사람이 미국을 재산권의 안정성과 법의 지배를 통해 부유해지고 민주화를 이룩한 포용적 제도의 모범국으로 여겼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의 소득 분배는 금권 정치가 지배하는 사회처럼 왜곡돼 있다. 또한 민주 정치를 지탱하는 대의 제도도 선동 정치가의 공격으로 불안해 보인다.

‘좁은 회랑’은 또 리버럴 민주주의의 명백한 취약성을 설명하기 위해 쓴 책으로 읽힌다. 저자들은 개방적 정치 제도를 지키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필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붉은 여왕 효과’라는 신조어도 만들었다. 루이스 캐럴의 책에 나오는 인물들같이 시민사회는 권위주의 지도자에게 뒤처지면 안 되고, 전제주의 경향을 억제하기 위해 더 빠르게 움직여야만 한다.

시민사회가 리바이어던과 같은 ‘거대 권력’에 맞서기 위해서는 사회 분화와 진화가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대부분 엘리트 권력에 도전할 능력을 갖춘 대중 집단이 출현하거나 엘리트의 자체 분열을 통해 탄생했다. 19, 20세기에 산업화, 세계대전 그리고 탈 식민지화로 인해 그런 집단이 나타났다. 결국 지배 엘리트는 보편적 선거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대가로 선거권을 갖게 된 계층은 지배 엘리트의 재산을 마음대로 몰수할 수 없도록 하는 제한을 수용했다. 엘리트와 대중이 선거권과 재산권을 교환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리버럴 민주주의는 소수자 권리처럼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민주주의를 탄생시키는 주요 수단인 ‘정치적 합의’는 협상 과정에서 시민권의 혜택이 가장 절실한 소수자를 배제하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 소수자들은 엘리트처럼 자원을 보유하지도 못했고, 다수파가 지닌 수적 우위도 없다. 따라서 엘리트와 다수파의 정치적 합의는 리버럴 민주주의보다, 선거 민주주의라고 하는 빈약한 민주주의를 선호한다.

왜 그렇게 리버럴 민주주의가 구현된 사회를 찾기 힘든지 이제야 이해가 될 것이다.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지 못하는 것은 민주주의 출현 이면에 숨은 정치 논리의 결과이다. 이런 결론은 리버럴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황에서 매우 불편한 진실이다. 리버럴 민주주의가 단단히 뿌리내린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리버럴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이해하게 된다면,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그에 대한 위협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줄어들 것이다.

대니 로드릭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공공정책대학원 교수

ⓒProject Syndic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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