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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어떤 호의

입력
2019.10.21 04:40
수정
2019.10.21 06:19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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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은 노동력만을 파는 게 아니라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판다. 지금 이곳에서 우리는 사람이기도 하고 상품이기도 하다. ©게티이미지뱅크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은 노동력만을 파는 게 아니라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판다. 지금 이곳에서 우리는 사람이기도 하고 상품이기도 하다. ©게티이미지뱅크

최근에 본 기이한 장면 하나가 잊히지 않는다. 흔히 BJ라고 불리는 개인 인터넷 방송 진행자가 시청자, 혹은 구독자를 향해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하는 모습이다. 나로서는 십대인지 이십대인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앳된 여성 진행자였다. 누가 소리만 버럭 질러도 금세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보이는 해사하고 여린 외모의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의 사소한 교칙 위반과 출결 문제에 대해 사과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를 표적 삼아 비방한 내용이 사실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내밀한 사적 정보가 담긴 문서들까지 공개하면서. 그러다가 불가피하게 노출된 학과 성적과 관련해서는 성적이 좋지 않아 죄송하다는 말까지 덧붙이며 머리를 조아렸다. 포털의 상위 검색어에서 이리저리 링크를 따라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그 상황을 나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개인 인터넷 방송에서 먹방, 즉 음식 먹는 방송을 하는 사람이었다. 방송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선풍적 인기몰이를 했다. 예쁘장한 외모지만 과하게 성적인 분위기를 풍기거나 지나치게 아양을 떨지 않는 순진한 말투가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 만한 이웃집 소녀 같았다. 그러나 큰 인기를 얻은 결정적인 이유는 가냘픈 체구만 보아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을 만큼 먹어치우는 음식의 양 때문이었다. 그는 웬만한 장정도 먹기 힘든 엄청난 양의 음식을 방송 중에 먹어치웠다. 이따금 라면 몇 봉지, 햄버거 몇 개 등등의 예전 기록을 갱신하기도 했다.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지면 누구나 방안에 틀어박혀 치킨, 피자, 아이스크림 같은 음식들로 자기 파괴에 가까운 폭식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먹방이란 그렇게 충동적이고 단순한 쾌락 추구의 행동이 아니다.

먹방은 맛있고 특이한 음식을 소개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기록적인 양의 음식을 먹어치우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일주일에 세 번에서 다섯 번까지 규칙적으로 동영상을 업로드해야 인기를 유지할 수 있단다. 거의 날마다 폭식해야 한다는 의미다. 몸을 쓰는 모든 일은 일상적 한계를 넘을 때 고통과 부작용이 따르게 마련이다. 위의 용량을 늘리는 일이라고 예외일까. 팬들은 방송에서 더 많은 양의 음식을 먹어치울 때마다 놀랍고 신기해서 이른바 별풍선이라는 것을 쏘며 진행자의 분투를 ‘격려’한다. 물론 홀로 적적하게 밥을 먹다가, 새로 사귄 여자 친구처럼 귀염성 있고 복스럽게 음식을 먹는 진행자와 밥 한 끼 같이 먹은 듯한 즐거움을 느꼈고, 그 보상으로 별풍선을 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기본적으로는 호의다.

한 개 가격이 110원인 별풍선 하나당 진행자는 70~80원 정도의 수익금을 얻게 된다. 광고나 협찬이 붙는 경우도 있어서, 인기가 높은 진행자는 평범한 임금 노동자가 상상할 수 없는 돈과 인기를 누리게 된다. 그러니 근거 없는 헛소문에 시달리다가, 음식을 많이 먹는 일과 아무 상관도 없는 학창시절의 출결 사항과 성적, 인성을 눈물까지 보이며 인증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은 노동력만을 파는 게 아니라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판다. 지금 이곳에서 우리는 사람이기도 하고 상품이기도 하다. 오고 가는 돈의 규모가 커질수록, 시스템이 복잡해질수록, 흔히 ‘인간성’ 이라든가 ‘개인의 고유함’이라고 믿고 있는 부분이 점점 갈려 나가고 삭제된다. 사람에서 상품 쪽으로 더 많이 치우칠수록, 허용되는 자발성과 고유함은 줄어든다. 이 세상에는 한 번 들어가면 스스로 걸어 나올 수 없는 막대한 돈의 규모나 시스템의 복잡성이 있고, 그 주위를 감싸고 있는 것은 거미줄처럼 끈적한 호의의 그물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환호하고 질책하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방치하기도 하는 그것이 진정한 호의인지는 모르겠으나.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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