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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슬픈 돼지

입력
2019.10.05 04:4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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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과 직관을 가진 이라면 한 번은 질문해야 한다. 전국으로 확산되는 아프리카 돼지 열병으로 인해 수천 마리 돼지가 한꺼번에 ‘살처분’되는 이 현실을 그저 돼지농가만의 불운으로 치부해도 되는 것인지. ©게티이미지뱅크
연민과 직관을 가진 이라면 한 번은 질문해야 한다. 전국으로 확산되는 아프리카 돼지 열병으로 인해 수천 마리 돼지가 한꺼번에 ‘살처분’되는 이 현실을 그저 돼지농가만의 불운으로 치부해도 되는 것인지. ©게티이미지뱅크

스러지는 생명의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쳐 본 사람은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절망에 잠식된 저 눈동자를 두고두고 잊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 눈빛을 여섯 살에 처음 보았다. 어느 봄, 동네 아저씨 여러 명이 아랫집 홍씨 할아버지네 마당 가장자리에 가로로 길쭉하게 땅을 팠다. 내 키 정도 깊이로 구덩이를 만든 어른들이 새끼 산양 한 마리를 끌고 왔다. 어린 우리가 틈만 나면 쓰다듬고 풀을 먹이던 아이였다. 어떻게 알았던 걸까? 저쪽 우리에 갇힌 어미가 날카로운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목줄에 매달려 끌려오는 새끼 역시 무언가를 감지했던 것 같다. 가늘게 울어대며 어미 쪽으로 방향을 돌리려 발버둥 쳤지만, 젊은 어른의 힘을 이겨내지 못했다. 아저씨 세 명이 마당 한쪽에서 펄펄 끓고 있는 가마솥의 물을 양동이에 퍼 담았다. 새끼 양이 구덩이로 떨어지기 무섭게 양동이의 끓는 물이 아래로 쏟아졌다. 그 순간, 구덩이에 갇혀 죽어가는 산양의 새카만 눈동자와 마주쳤다. 고통과 체념과 슬픔으로 가득한 그 눈빛에 질려버린 나는 눈을 감지도, 외면하지도 못한 채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그 저녁 밥상에 양고기가 올라왔다. 살아 있던 새끼 양의 여린 털을 만질 때, 그에게서 풍기던 달달한 젖내와 풀냄새를 아주 좋아했다. 밥상 위 양고기의 누릿한 냄새를 맡은 나는 두엄가로 달려가 쓴물이 넘어올 때까지 토했다.

그날 이후 우리 집에서 함께 사는 소와 닭과 산양과 돼지의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됐다. 쏟아지는 핀잔을 감당하기 힘들어 애써 한 조각을 입안에 넣었다가도 죽어가던 산양의 슬픈 눈빛과 들척지근한 고기 냄새가 떠올라 뱉어내곤 했다. 아주 예민하던 때는 계란이나 우유 냄새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계란과 우유는 고기와 다르다고, 그마저 안 먹으면 몸과 머리의 성장에 심각한 타격이 온다고 설득하는 아버지가 안쓰러웠다. 무엇보다 도끼눈을 뜨고 내 유난스러움을 질책하는 엄마 손에 내가 맞아죽을 것 같아서, 계란과 산양 젖은 먹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뭐가 뭔지 모르는 여섯 살부터 페스코 베지테리언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다. 실과시간에 네 가지 돼지 품종에 대해 배웠다. 버크셔, 요크셔, 햄프셔, 두룩저어지. 선생님은 우리가 뚱뚱한 친구를 “야, 이 누룩돼지 새끼야”라고 부르는 게, 바로 두룩저어지라는 품종에서 유래했다는 고급정보를 알려주셨다. 아이들이 살집 투실한 친구를 돌아보며 낄낄거릴 때 선생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동수단으로 쓰이는 말, 농사에 사용하는 소, 계란을 낳는 닭, 우유를 짜는 젖소와 다르게 돼지는 순전히 고기로 잡아먹기 위해 키우는 동물이라고. 따라서 더 빨리, 더 크게 자라는 품종을 개발하기 위해 학자들은 지금도 연구 중이며, 돼지가 콜레라 등 여러 병에 취약한 이유도 거기에 있을 거라고. ‘순전히 잡아먹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고, 자라고, 새끼를 낳는다고? 다시 한번 뒤통수를 세게 가격당한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면 현대인의 식문화는, 어린아이라도 단번에 눈치챌 수 있는 인간의 폭력성과 죄의식을 교묘히 왜곡하고 회피하기 위한 발버둥과 다름없다. 튀김옷을 입혀 바삭 굽고, 맛깔난 소스와 야채로 버무리고, 잘게 다져 형체를 알 수 없는 패티로 탄생시킨 요리 앞에서 접시 위의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 건 산통 깨는 일이다.

아무리 그래도, 연민과 직관을 가진 이라면 한 번은 질문해야 한다. 전국으로 확산되는 아프리카 돼지 열병으로 인해 수천 마리 돼지가 한꺼번에 ‘살처분’되는 이 현실을 그저 돼지농가만의 불운으로 치부해도 되는 것인지.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가는 돼지의 슬픈 눈빛을 정면으로 바라봐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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