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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의 취향] 어린 왕 헌종, 고독한 왕실 삶 달래며 ‘인장’에 새긴 말

입력
2019.10.05 04:4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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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실이라 하면 치열한 궁중암투만 떠올리시나요. 조선의 왕과 왕비 등도 여러분처럼 각자의 취향에 따라 한 곳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사들이 그간 쉽게 접하지 못했던 왕실 인물들의 취미와 관심거리, 이를 둘러싼 역사적 비화를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마다 소개합니다.

<3> 인장 수집가 헌종의 보물상자

2014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당시 반환한 헌종의 인장 쌍리(왼쪽)와 이를 종이에 찍은 도장면의 모습.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2014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당시 반환한 헌종의 인장 쌍리(왼쪽)와 이를 종이에 찍은 도장면의 모습.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인류의 역사, 동서고금을 통틀어 인간의 본성과 가장 맞닿아 있는 행위 중 하나가 수집이다. 사물을 소유하는 한 가지 형태지만 재화의 축적이나 단순한 저장 강박과는 구분된다. 수집가는 일반적인 소유자와는 달리 물건 본연의 도구적 기능은 부차적으로 생각한다. 수집품의 질과 그것이 자신에게 갖는 의미를 더욱 중시하고, 수집 과정에서 애장품에 사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컬렉션에 대한 애착에서 나오는 쾌락이 수집을 지속해 나가는 동력이다.

조선의 24번째 왕인 헌종(1827~1849)은 서화와 전각 애호가로 알려져 있다. 전각은 나무, 돌, 옥 등에 전서체(대표적 한자 서체 중 하나)를 새겨 인장을 만드는 것을 뜻한다. 인장을 만드는 예술이라 볼 수 있다.

인장 수집은 조선의 임금이 탐닉할 만한 고상한 취미였다. 헌종은 본인을 나타내는 자호와 별호를 새긴 인장뿐 아니라 수장인(소장한 도서나 서화에 찍는 인장), 감정인(서화 등의 감정과 관련된 인장), 서간인(봉투를 봉하고 찍는 인장), 명구인(좋은 글귀를 새긴 인장) 등 각종 인장을 제작하고 모았다. 수집한 인장은 700방이 넘었다. 때로는 스스로 인장면에 글자를 새긴 듯하다. ‘원헌(헌종의 호) 손수 새김(元軒手拓)’이라고 새겨진 인장이 바로 헌종이 직접 쓰고 새긴 작품일 것이다.

19세기 조선에서는 청 문화의 영향으로 고증학, 금석학과 전각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헌종은 여기에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가 추사(秋史) 김정희의 스승으로 유명한 청의 서예가 옹방강(翁方綱)의 팬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옹방강의 당호인 ‘보소당(寶蘇堂)’ 편액을 창덕궁 낙선재(樂善齋)에 걸어 놓고 자신의 당호로 썼고, 수집한 인장의 카탈로그를 편찬하면서 그 제목도 ‘보소당인존’이라고 붙일 정도였다.

헌종의 이름을 새긴 어휘인의 모습.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헌종의 이름을 새긴 어휘인의 모습.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여기서는 이 보소당인존 속 애장품의 면면을 들여다 보면서 청년 왕 헌종의 생각을 엿보려고 한다.

헌종은 22세에 사망한 아버지인 효명세자(1809~1830)와 마찬가지로 젊은 나이에 요절한 문예 청년이었다. 1830년 아버지 효명세자가 죽고 왕세손이 되었다가, 1834년에 할아버지 순조의 뒤를 이어 8세에 즉위했다.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즉위한 인물이다. 15년간 왕위에 있었지만 헌종이 세상을 떠날 때의 나이는 23세밖에 되지 않았다.

한 나라의 군주였으나 그가 추구한 행복은 부귀영화가 아니었다. 그의 인장에 새겨진 ‘좋은 붓과 벼루는 인생의 한 기쁨이다(筆硯精良人生一樂)’라는 글귀에서 그의 소박한 즐거움을 엿볼 수 있다. 그는 그저 ‘글씨와 더불어 스스로 즐겼다(翰墨自娛)’고 했다.

헌종은 대부분의 세월을 궁궐 안에서 국왕의 일상을 쳇바퀴 돌듯 살아가면서 서화와 전각을 통해 옛 사람을 만나고 먼 곳의 명사와 교유했다. ‘금석으로 사귐(金石交)’ ‘천하의 선비들과 벗함(友天下士)’ ‘문자로 맺은 인연(文字因緣)’과 같은 문구의 서화 수장인을 보면, 비록 자신은 궁 안에 있으나 멀리 제주의 유배지에 있는 추사, 연경의 옹방강과도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기쁨이 느껴진다.

‘옛 사람의 책을 읽다(讀古人書)’ ‘옛 사람을 생각하네(我思古人)’ ‘마음으로 사모하고 손으로 따른다(心慕手追)’는 장서인에서는 책을 읽고 필자와 시대를 넘어선 교감을 바라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좋아하는 서예가의 필첩을 앞에 두고 따라 쓰면서 즐거워했을 수도 있다.

2014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방한시 반환된 헌종의 인장 우천하사(왼쪽)와 이를 종이에 찍은 도장면의 모습.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2014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방한시 반환된 헌종의 인장 우천하사(왼쪽)와 이를 종이에 찍은 도장면의 모습.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헌종이 애장했던 인장들에는 김정희나 옹방강과 같이 그가 좋아했던 서예가들의 흔적이 많이 보인다. 당시에는 옛 사람이나 동시대 명사들의 인장을 본받아 만드는 일도 많았기 때문에, 헌종도 청의 옹방강 및 그 학맥과 관련된 보소당(또는 보소재), 홍두(紅豆), 향소관(香蘇館) 또는 추사와 관련된 척암(惕闇) 등의 인장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본 보소당인존에는 헌종의 어휘(임금의 이름)를 새긴 인장(臣奐印信)과 자를 새긴 인장(文應)도 있는데, 어휘인과 어자인은 딱 하나씩만 있다.

경제적 가치와 실용성을 넘어 수집가의 눈에 애장품이 소중해 보이는 것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자신만의 의미가 담겨 있어서다. 수집품들은 수집가 자신을 머나먼 세계와 이어주며 수집가를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탈출시켜 주는 마법과 같은 물건이다. 이런 수집가의 심리를 ‘자기 선물주기(self-gifting)’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헌종의 인장들에 아주 들어맞는 설명인 것 같다.

안타깝게도 보소당인장의 실물은 궁궐 화재로 많이 소실되었다. 2014년 4월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면서 국새와 왕실 인장 등 9점을 반환했는데 이 중에 ‘향천심정서화지기’ ‘우천하사’ 등 헌종의 인장 5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인장들은 모두 보소당인존에 찍혀 있는데, 실물 인장이 돌아온 것이다. 이들은 몸체에 다채로운 문양이 새겨져 있고 소재도 옥, 금동 등의 고급재료여서, 후대의 모각본이 아니라 헌종이 가졌던 원본으로 보인다.

이렇게 수집한 인장들에 대한 헌종의 애정을 잘 보여주는 물건이 국립고궁박물관에 남아 있다. 인장을 보관했던 서랍장인 ‘보소당인존 장’이다. 120㎝ 높이의 목제 서랍장 한 쌍으로, 각각 10개씩의 서랍이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헌종이 인장을 보관했던 서랍장인 보소당인존장. 120㎝ 높이의 목제 서랍장 한 쌍이다. 인장에 혹여나 흠이 날까 서랍 안의 사면을 쿠션으로 둘러 놓았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헌종이 인장을 보관했던 서랍장인 보소당인존장. 120㎝ 높이의 목제 서랍장 한 쌍이다. 인장에 혹여나 흠이 날까 서랍 안의 사면을 쿠션으로 둘러 놓았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그런데 이것은 그냥 두 대의 서랍장이 아니라 바로 두 권의 인보이다. 책을 서랍장으로 만든 것이다. 서랍장 문짝이 목차요, 각 서랍장이 장과 절이다. 첫 번째 서랍장에는 전집(前集), 두 번째 서랍장에는 후집(後集)이라고 새겨져 있으며 책에 실린 순서대로 인장을 번호를 매겨 보관했다. 서랍장 문 안쪽에 붉은 종이를 붙여 ‘전집 제1층, 제1방부터 제40방까지 합 40방’ ‘전집 제2층, 제41방부터 제100방까지 합 60방’처럼 정리해 놓은 것이다. 보소당인존으로 일목요연하게 만들고, 다시 보소당인존 장을 열면 그 안에 아끼는 인장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으니 얼마나 애지중지한 것인가.

아마도 이 장은 헌종의 기쁨이 담긴 상자였을 것이다. 장이 기울어져도 서랍이 쏟아지지 않도록 만들어진 서랍장의 턱과, 옥이며 마노 같이 귀한 재료로 만든 인장에 혹여 흠이 날까 서랍 안의 사면을 쿠션으로 둘러 놓은 정성에서 젊은 임금의 애착을 볼 수 있다.

보소당인존에 찍힌 헌종의 인장의 모습. 밖의 사람에게 말할 만한 것이 못 된다(不足爲外人道也)는 글귀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보소당인존에 찍힌 헌종의 인장의 모습. 밖의 사람에게 말할 만한 것이 못 된다(不足爲外人道也)는 글귀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인장의 글귀를 보니 마치 그가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밖의 사람에게 말할 만한 것이 못 된다(不足爲外人道也)”

이 문구는 원래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온다. 우연히 강물을 따라 도원을 방문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떠나려는 사람에게, 밖에 나가거든 도원에 대해 알리지 말라고 한 말이다. 서화와 전각에 둘러싸여 오직 혼자만의 즐거움을 누렸던 곳, 보소당이 헌종의 무릉도원이었던 셈이다.

박경지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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