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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차례상 위의 ‘엄친아’

입력
2019.09.10 18:0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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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신임 법무부 장관이 10일 오전 서울 성북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열린 현장 국무회의에서 메모를 하고 있다. 류효진 기자
조국 신임 법무부 장관이 10일 오전 서울 성북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열린 현장 국무회의에서 메모를 하고 있다. 류효진 기자

예전보다야 덜하겠지만 명절 차례상엔 으레 ‘엄친아·엄친딸’이 오른다. 추석은 입시를 앞둔 시점이고 설날은 대략 그 결과에 따라 진로가 결정될 무렵이니 가족 친지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 자녀들의 입시와 진학을 둘러싼 담소와 정보교환의 시간을 피하기 어렵다. 엄친아·엄친딸이 등장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엄친아 역할을 주로 했었다. 서울대라는 학벌이 벼슬임을 나는 명절 때마다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의 어깨에도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 유효기간은 경험적으로 대략 10년 정도였다. 박사학위까지 받고 세상에 나왔는데 연구원이라는 직업도 불안정하고 연봉도 형편없는데다 결혼도 못하고 있으니 30대 이후로는 잔소리와 훈계의 아이콘이 돼버렸다. 아직도 계약직에 미혼의 신분이라 올해도 추석을 맞는 내 마음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

잔소리를 오래 듣다 보면 어떻게든 방어기제를 찾기 마련이다. 유명인의 파경이나 가정불화, 자녀문제 같은 뉴스는 당사자에게는 참 미안하게도 나 같은 싱글에게 꽤 쓸모 있는 방패가 되기도 한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덕담이 나올 가능성도 높다. 1인 가구가 늘어난다는 소식도 호재다. 직장과 연봉 문제는 더 어렵다. “서울대까지 나왔는데...”라는 식으로, 예전에는 벼슬이었던 학벌이 이제는 나를 찌르는 칼날이 되어 돌아온다. 한동안은 그럴듯한 방어막이 있었다. 대학생 때 학생운동을 했던 나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와 궁합이 잘 맞지 않았다. 그 9년의 세월 동안 나는 열심히도 당시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쓰고 책을 냈다. 그게 구직의 발목을 잡은 적이 있었다. 실패의 상처가 아물고 나니 꽤 쓸 만한 방패가 되었다. 이 세상의 온갖 부정부패와 부조리함을 갖다 붙이면 명절날 내 비루한 처지를 합리화해 줄 아주 그럴 듯한 서사가 완성되었다.

이제는 이 모든 핑계가 더 이상 먹히지 않는 상황이 돼 버렸다. 정권이 바뀌었고 두 전직 대통령은 감옥에 있거나 재판이 진행 중이다. 게다가 조국이라는 희대의 엄친아가 있지 않은가. 조국이 어떤 인물인가. 내가 한참 고등학교에 다니던 18세의 나이에 최연소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고 28세 되던 해에 이미 울산대에서 법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학교 다닐 때는 나보다 더 열심히 운동에 투신했고 잠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새 정권의 첫 민정수석으로 청와대에 입성해 이제 법무부장관에 취임했다. 내 신세에 대한 나의 이론(실은 핑계)이 옳다면 조국만큼 출세하지는 못하더라도 내 인생에 뭔가 긍정적인 변화가 생겨야 하건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나의 이론이 옳다고 판명되려면 조국은 원래 근접불가의 특출한 존재이거나 또는 어떻게든 조국의 인생이 실패작이어야만 한다.

첫째 조건은 사실과 부합해 보인다. 금수저 출신에 출중한 능력, 톱스타급 외모, 훤칠한 키와 중후한 목소리까지 평범한 내가 갖다 댈만한 요소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 조국이나 내가 선택한 결과가 아니니 그저 흙수저로서의 허탈함만 남을 뿐이다. 반면 둘째 조건은 큰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알고 보니 저 사람 인생 잘못 살았어, 실패한 거야”라는 결론이 나온다면 내 이론은 탄력을 받을 것이다. 그 잘난 조국도 역시나 온갖 불법과 꼼수로 인생 살았어요, 어머니, 하는 말이 명절날 가족들에게 위안과 평화를 가져다 줄 테니까.

여기에는 솔직히 첫째 조건을 충족하는 조국에 대한 나의 시기와 질투가 담겨 있다. 장관으로서의 결정적인 하자가 진작 나왔더라면 나 또한 적극적으로 ‘조국 때리기’에 동참했을 것이다. 사법개혁과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바라는 입장에서야 조국이 법무장관으로서 최적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사람은 이성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거창한 사법개혁보다야 내 마음의 평화와 행복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가슴 속 깊은 심연의 어디선가 수십 군데를 전격적으로 압수수색한 검찰을 응원하고 있었고 하루빨리 움직일 수 없는 비리의 증거가 나오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이성과 본능의 어정쩡한 타협이 자아내는 불편함에서 빨리 벗어나 마음 편하게 조국에게 돌을 던질 테니까. 후보자 지명 뒤로 지금까지 관련기사만 최소 수 만 건, 검찰의 압수수색 30여 곳, 투입된 검찰 특수부가 무려 넷, 초유의 11시간 기자간담회, 그리고 청문회까지, 이 정도면 단연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후보자 검증임이 확실하다. 털어서 먼지가 안 나면 없는 먼지라도 만들어낼 수 있는 물량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많던 의혹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증거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사건과 사건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관계 대신 억측과 소설만 넘쳐났다.

검찰 수사가 성공적이었다면 그 잘난 엄친아 조국도 저렇게 만신창이로 낙마했다며 추석 차례상에서 나를 방어할 수 있었을 텐데, 지난 한 달 동안 이 난리법석을 피운 결과가 달랑(?) 표창장 하나라니. 겨우 이 정도로는 나의 못남이 가려지지 않을 것 같아 고향으로 향하는 내 마음이 꽤나 착잡하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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