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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대화를 시작하는 방법

입력
2019.08.31 04:4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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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식 식생활’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함의를 담아 사용됐다. 처음에는 비만, 고혈압, 심장병의 원인이었다가 이윽고 당뇨, 암, 돌연사까지 유발한다는 설명이 따라붙었다. 21세기에 들어서자 마침내 서구식 식생활은 탈모, 무좀, 입냄새,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되는 잦은 방귀에 이르기까지 온갖 질병을 불러일으키는 재앙신의 모습이 되었다. ©게티이미지뱅크
‘서구식 식생활’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함의를 담아 사용됐다. 처음에는 비만, 고혈압, 심장병의 원인이었다가 이윽고 당뇨, 암, 돌연사까지 유발한다는 설명이 따라붙었다. 21세기에 들어서자 마침내 서구식 식생활은 탈모, 무좀, 입냄새,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되는 잦은 방귀에 이르기까지 온갖 질병을 불러일으키는 재앙신의 모습이 되었다. ©게티이미지뱅크

인생을 대충 살아온 사람에게도 삶의 빛을 비추어주는 위키하우닷컴에 따르면, 대화를 재치있게 하려거든 가벼운 잡담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진지한 주제로 넘어가기 전에 별 뜻 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 가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아무 뜻이 없는 말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날씨 이야기는 고리타분하고 최근의 뉴스 이야기는 간혹 불쾌감을 준다. 대한민국 6공화국에는 나이, 직업, 거주지, 가족관계를 묻는 전통적인 대화법이 있었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이제 그러한 호구조사는 질문하는 사람의 고상함을 크게 해치는 것이 되었다. 요컨대 말문을 잘 트려면 아무 뜻이 없을 뿐 아니라, 너무 상투적이지 않으면서도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누구에게나 익숙한 말을 해야 한다.

이런 때를 위해서였는지 현명한 어르신들은 정말로 아무 뜻이 없는 말들을 만들어 놓았다. ‘우리나라의 가을 하늘은 푸르다’라든지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이고 사계절이 뚜렷하다’같은 것들 말이다. ‘서구식 식생활’도 그런 뜻 없는 말들 중 하나로, 오랜 기간 한국인의 대단한 사랑을 받아온 표현이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도 서구식 식생활(또는 서구화된 식습관)을 언급하는 신문 기사는 매일 쏟아진다.

그렇다면 누가 이 유행어를 만들었을까? 연원을 거슬러올라가면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2년, 경향신문에 기록된 모리시타 케이이치 박사의 인터뷰를 찾을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사람의 체질과 식생활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일본인은 서구식 식사로 변환되었기 때문에 병을 앓는다는 것이다. 이후 대통령이 긴급조치 1~5호를 발동한 1974년에는 이길상 박사가 서구식 식생활은 우리 체질에 안 맞는다는 강좌를 열었다. 강좌 내용을 전하는 소식부터 이듬해까지, 매일경제신문은 서구식 식생활이 현대병을 유발한다는 일곱 편의 기사를 연달아 냈다.

그때부터 서구식 식생활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함의를 담아 사용됐다. 처음에는 비만, 고혈압, 심장병의 원인이었다가 이윽고 당뇨, 암, 돌연사까지 유발한다는 설명이 따라붙었다. 21세기에 들어서자 마침내 서구식 식생활은 탈모, 무좀, 입냄새,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되는 잦은 방귀에 이르기까지 온갖 질병을 불러일으키는 재앙신의 모습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러한 발화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기능했을 것이다. 즉, 결함이 있는 서구식 식생활의 반대편에는 우리 조상들의 슬기가 담긴 건강한 식생활이 있다는 것이다. 충분한 만큼의 쌀을 생산하여 더는 혼분식을 장려할 필요가 없어진 시점에서 ‘서구식 식생활’은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의 반대되는 위치에 놓였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오래지 않아 깨진다. 우리는 서구인들이 즉석식품이나 패스트푸드를 그다지 먹지 않는다는 사실과 서구식 식생활 때문이라던 질병 대부분이 서구보다 한국에 더 많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지난 2013년 방영된 JTBC ‘닥터의 승부’ 88회는 ‘서구식 식생활’의 의미 없음을 외설적으로 드러냈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대장암 발생률의 증가 원인으로 역시나 서구식 식생활을 꼽았다. 화면에는 대장암 세계 2위라고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의사는 대장암 예방에 좋다면서 치즈와 요거트, 그러니까 전형적인 서구식 식단을 추천했다.

오늘날 ‘서구식 식생활’은 더이상 사람들에게 위협감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친숙해서 편안하고, 모든 질병의 원인이 규명된 듯 보이기 때문에 안전한 느낌마저 준다. 그렇다면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 이 말을 언급하는 것은 어떠한가? 나는 최근 어떤 계약서에 서명할 일이 있었는데 약속시간에 오 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미안합니다, 서구식 식생활 때문에”라고 말했더니 상대방은 예상치 못한 말에 큰 웃음을 터트렸고 나는 그날 훌륭하고도 우아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손이상 문화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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