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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극일(克日)보다 소중한 가치

입력
2019.07.31 18:00
수정
2019.07.31 18:31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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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곽 드러난 부품소재 국산화 지원책

노동ㆍ환경 규제 완화에 초점은 유감

克日보다 중요한 건 인권ㆍ안전ㆍ건강

31일 국회에서 열린 ‘일본수출규제대책 민ㆍ관ㆍ정 협의회’ 제1차 회의 장면. 연합뉴스
31일 국회에서 열린 ‘일본수출규제대책 민ㆍ관ㆍ정 협의회’ 제1차 회의 장면. 연합뉴스

일본의 경제 도발로 촉발된 한일 갈등이 한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아베 정권은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배제하는 조치까지 강행할 태세다. 사실상 우리를 ‘적성국’에 준하는 상대로 여기는 결정이란 점에서 한일 갈등은 또 다른 차원으로 번져갈 수밖에 없다.

정부는 진작부터 극일(克日)을 천명했다. 일본을 넘어서려면 직접적으로는 부품ㆍ소재 국산화가 절실하다. 이를 위한 정부 지원책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노동ㆍ환경 규제 완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유감스럽다. 이들 규제가 수많은 시민과 노동자의 희생을 딛고 어렵게 마련됐거나 이제 겨우 토대를 닦아 가는 과정에 있고, 이들 규제가 불가침의 시민적 권리 실현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노동 규제 완화는 주 52시간 근무제 특례 확대가 핵심이다. 정부는 “수출규제 품목 국산화를 위한 연구개발(R&D), 제3국 대체 조달 관련 테스트 등의 연구ㆍ지원 필수 .인력에 대해 근로기준법에 따른 특별연장근로를 인가할 계획”이다. 환경 규제 완화는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참사와 이듬해 구미공단 불산 누출사고 등을 계기로 정비된 화평법(화학물질 등록ㆍ평가법)과 화관법(화학물질관리법)을 겨냥하고 있다. 정부는 장외영향평가서 작성과 적합성 평가 등의 비중 축소나 간소화로 기업의 화학물질 관련 업무의 효율성을 높일 계획이다. 주 52시간제와 화학물질 규제법 때문에 핵심 소재 개발과 국산화가 어렵다는 대기업의 볼멘소리를 십분 반영한 것이다.

정부의 고충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일본의 수출규제가 우리 경제의 중추인 반도체 산업을 직접 겨냥한 상황에서 보수 진영의 지원을 등에 업은 대기업의 노동ㆍ환경 규제 완화 요구를 마냥 거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문재인 정부는 주 68시간 근무를 가능케 한 노동부의 과거 행정 해석에 대해 공개 사과까지 하며 주 52시간 근무제를 정착시킨 당사자다. 화평법ㆍ화관법의 경우에도 이번 대책에 법안 자체를 손질하는 내용은 포함돼 있지 않다.

문제는 예외 조치의 반복과 이에 따른 규제의 형해화 가능성이다. 특별연장근로만 해도 물꼬가 터진 이상 일본이 화이트리스트 배제를 강행해 수출규제 품목이 많아지면 인가 범위도 대폭 확대될 것이다. 그 결과 탄력근로제 단위 기간을 6개월로 늘리자는 노사정 합의를 넘어 보수 야당과 대기업이 요구하는 선택근로제ㆍ재량근로제 확대까지 협상 테이블에 오를 수 있다. ‘불가피한 상황’을 이유로 대기업이 혁신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낙인찍는 것을 용인했으니 화학물질 규제법 개정 논의도 시간 문제다.

시민들이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의 극일 호소를 지지하며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나 일본 여행 취소 등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식민 지배의 불법성은 물론 반인륜ㆍ반인권적 강제노동과 성노예화 만행에 대해 최소한의 사과조차 없는, 핵심 소재ㆍ부품 공급을 무기 삼아 국제분업 구조(글로벌 밸류체인)를 근본적으로 훼손한 아베 정권의 무도한 작태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이명박ᆞ박근혜 정부와 달리 진심으로 징용 피해자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시민들은 당장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을 알면서도 상당 기간 이어질 일상의 피곤함과 경제적 어려움을 감내한 채 힘을 보태는 것이다.

주 52시간 근무제는 세계 최장 노동시간과 ‘과로사 공화국’의 오명을 씻기 위한 지난한 사회적 논쟁의 결과다. 화학물질 규제법도 무고한 이들의 희생에 빚지고 있다. 일상의 안전과 건강한 삶, 인권 보장은 어떤 제약도 없이 누려야 할 시민들의 권리다. 대기업의 요구대로 노동ㆍ환경 규제를 풀더라도 부품ㆍ소재 국산화가 쉽지 않을 거라 여기는 시민들도 대체로 정부 지원책을 지지할 것이다. 그렇다고 국가ㆍ정치ㆍ경제 권력이 이를 당연시한다면 오래지 않아 ‘부담의 사회화, 편익의 사유화’ 논란과 함께 시민들의 분노를 피할 수 없다. ‘기승전-극일’보다 더 소중한 불가침의 시민적 권리와 가치가 있다.

양정대 논설위원 torc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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