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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생큐 아베

입력
2019.07.12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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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3일 일본 도쿄의 일본기자클럽에서 열린 당수토론회에 참석해 토론을 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3일 일본 도쿄의 일본기자클럽에서 열린 당수토론회에 참석해 토론을 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일본의 아베 정권이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문제 삼으며 반도체 소재의 수출을 규제하는 보복 조치를 단행했다. 반도체 수출에 대한 한국 경제의 의존도가 심각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베의 도발은 한국 경제의 심장을 겨눈 비수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2018년 기준 국민총소득 대비 수출입 비중은 82.4%였고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21.2%에 달했다.

한국과 일본 모두 자유무역을 통해 번영을 이루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베의 도발은 자유무역의 수혜자인 일본이 자기 정체성을 부정한 행위에 다름 아니다. 더욱이 삼권이 분립된 민주국가에 사법부의 판결을 이유로 보복 조치를 취한 것을 보면서 아베 정권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이해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그런데 냉정히 생각해 보면 이번 아베 정권의 도발은 한국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소중한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아베 정권의 도발은 한국 사회가 해결하고 싶었지만 기득권의 이해 때문에 할 수 없었던 오래된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복지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재벌 대기업 중심의 성장체제는 중소기업의 성장을 가로막아 사회보장제도의 보편성을 제약하는 족쇄와 같았다. 일본에서 손쉽게 양질의 소재를 수입할 수 있는 상황에서 재벌 대기업이 부품과 소재를 생산하는 국내 중소기업의 성장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재벌 대기업의 주력 수출상품의 국제 가치사슬이 해외에서 만들어진 상황에서 국내 중소기업의 성장을 기대할 수 없었고, 이런 현실에서 일자리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중소기업이 좋은 일자리를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좋은 일자리가 만들어지지 않으니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제도화되어 있는 사회보장제도 또한 영세자영업과 비정규직 등 취약계층을 배제하고 상대적으로 안정적 고용을 보장받고, 임금 수준이 높은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를 중심으로 제도화되었던 것이다. 1997년 이후 모든 정권이 사회보장의 보편성을 높이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한 이유도 재벌 대기업이 주도하는 조립형 수출 중심의 성장체제를 바꾸지 않는 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역대 정권 그 누구도 실행하지 못했던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해 국내 산업 간의 연관관계를 높이고, 이를 통해 사회보장의 보편성을 확대하는 일이 아베 정권의 도발로 가능해질 수도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이번 일은 한일 간의 정치ㆍ외교적 교환을 통해 단기적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재벌 대기업이 부품과 중간재를 해외에서 수입해 이를 노동자의 숙련을 배제한 자동화된 첨단 장비로 조립해 수출하는 성장방식의 취약성이 분명히 드러난 이상 성장체제의 전환은 불가피하다. 재벌 대기업 중심의 성장체제를 옹호했던 세력도 아베의 도발을 계기로 기존의 성장방식을 지지할 명분을 잃었다.

물론 재벌 대기업이 주도했던 익숙한 성장방식을 수정하면 불가피하게 기업과 국민 모두에게 고통이 따를 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현명한 전략과 국민의 단합된 지지로 위기를 극복한다면, 아베의 도발로 인한 단기적 고통은 장기적으로 한국 사회, 특히 평범한 국민의 삶을 바꾸는 쓴 보약이 될 수도 있다.

아베의 도발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지만,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 스스로 그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내부의 분열로 스스로 백기를 들지 않는다면 아베의 도발은 우리가 풀지 못했던 난제를 풀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한국 경제가 아베 정권의 도발로 당분간 어렵겠지만, 성숙한 대응으로 이번 기회에 인권과 국제질서를 존중하는 책임 있는 민주국가로서의 한국의 국격을 보여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도발의 주체는 아베 정권이지 일본의 깨어 있는 시민이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하자.

윤홍식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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