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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를 보다, 경제를 읽다] 고통을 예술로 승화한 프리다… 남미 혁명은 왜 그렇지 못했나

입력
2019.06.22 04:40
수정
2019.06.22 20:13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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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프리다 칼로와 남미의 혁명시대

※ 경제학자는 그림을 보면서 그림 값이나 화가의 수입을 가장 궁금해할 거라 짐작하는 분들이 많겠죠. 하지만 어떤 경제학자는 그림이 그려진 시대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생각해보곤 한답니다. 그림 속에서 경제학 이론이나 원리를 발견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하죠. 미술과 경제학이 교감할 때의 흥분과 감동을 함께 나누고픈 경제학자, 최병서 동덕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프리다 칼로 ‘두 명의 프리다’(1939), 멕시코 현대미술관, 173.5㎝×173㎝
프리다 칼로 ‘두 명의 프리다’(1939), 멕시코 현대미술관, 173.5㎝×173㎝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란 이름은 그녀의 전기 영화 ‘프리다’가 국내에 개봉되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그리 잘 알려진 화가가 아니었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은 경악과 찬탄 속에서 그녀의 삶과 예술세계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칼로는 멕시코 코요아칸(Coyoakan)에서 멕시코 혁명(1910~1921)이 일어나기 3년 전 태어났다. 독일계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딸의 이름을 평화를 뜻하는 독일어 ‘Fried’에서 따와서 여성명사형인 ‘Frida’라고 지었다. 그러나 이름과는 달리 그녀의 삶은 고통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두 가지 사건은 칼로로 하여금 비극적이지만 예술가적인 삶을 살 수밖에 만들었다. 그 하나는 열여덟 살에 당한 버스충돌 사고였다. 그로 인해 평생 척추를 고정하기 위해 석고 보정기를 착용해야 했다. 또 하나는 그녀가 일생동안 사랑했고 증오했던 남편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를 만난 것이었다.

◇초현실적일 만큼 강렬한 고통

칼로는 사고를 당한 이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강렬하면서도 독특한 화법은 특히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사실 초현실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자신의 내면세계 그 자체를 직설적으로 표출하였을 뿐이었지만, 보는 이에게는 낯설고 추상적인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의 삶 자체와 그녀가 체험한 혹독한 고통은 일반 사람들의 경험세계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가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지적 엘리트이자 상류계층 일원으로 평범하게 일생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칼로의 그림을 보면 왠지 불편하다. 그녀의 자화상을 보는 사람들은 드러나 보이는 심장과 뚝뚝 떨어지는 피에서 섬뜩함을 느끼며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진다. 강렬한 예술성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굳이 그녀의 그림을 벽에 걸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그녀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체험한 적도 없고 당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1920년대 중반부터 20여 년 간 칼로는 많은 자화상을 그리며 고통스러운 개인적 기억과 체험을 캔버스를 통해서 표출했다.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명의 프리다’(1939)를 보면 그녀의 행복했던 시절과 불행했던 시절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보여주고 있다. 그 행복과 불행의 원천은 바로 남편이었던 리베라였다. 오른편에는 프리다가 멕시코 전통의상을 입고 있으며 한 손에 남편의 어릴 적 사진을 들고 있다. 그녀의 심장은 온전한 채로 있다. 하지만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왼편의 프리다는 심장이 토막 나 있으며 동맥에서는 피가 떨어지고 있다. 칼로는 이 그림을 두고 자신의 페르소나(persona)의 이중성을 보여준다고 술회하고 있다.

러시아에 불어닥친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 러시아 공산주의 계파 간의 권력투쟁은 칼로의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제공하게 된다. 레닌(Vladimir Ilyich Lenin)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사회주의 체제가 아직 정비되지 못한 러시아에서는 권력을 쟁취하려는 피의 암투가 벌어졌고 스탈린(Joseph Stalin)은 반대파인 트로츠키(Leon Trotsky)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부하린(Nikolai Bukharin) 같은 트로츠키파 이론가들이 모조리 처단되자 트로츠키는 부득이 국외 망명을 선택하였다. 오랜 망명생활 끝에 트로츠키는 멕시코에 정착하게 되는데, 그가 멕시코에 오기까지 프리다의 남편이었던 리베라의 적극적인 역할이 컸다.

칼로는 멕시코 국립예비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을 만큼 지적이고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엘리트 계층이었다. 그녀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전 시대의 멕시코 문화에서 유럽의 문화적 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그녀는 멕시코로 망명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이었던 공산주의 혁명가 트로츠키와도 가까이 지냈는데, 영화 ‘프리다’는 칼로와 트로츠키와의 각별한 관계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거나 연인 사이로 묘사하거나 하는 장면 없이 은연중에 그 관계를 짐작하게 만든다.

◇남미의 혁명은 왜 분열만 낳았나

볼셰비키 혁명의 기운은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광범위한 사회주의 혁명 움직임을 불러 일으켰다. (지금까지도 제3세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체 게바라(Che Guevara)의 혁명정신은 전세계의 젊은이들에게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반면 북아메리카에서는 미국의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이후에는 별다른 혁명 움직임이 없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경제사적 질문은 아메리카 대륙이 유럽의 식민 종주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왜 북반부에서는 비교적 안정적인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정립된 반면에 남반부에서는 혁명과 사회주의 운동이 휘몰아치면서 정치적ㆍ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사회체제로 나아가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 체계적인 이론을 정립한 학자가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이다. 세계 여러 지역경제의 상이한 발전과정을 다룬 그의 저서 ‘문명’(Civilization)은 방대한 사료에 기초하여 역사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동양과 서양의 경제발전의 차이점을 설득력 있게 분석하고 있다.

퍼거슨은 재산권 범주를 가지고 유럽 식민지였던 북아메리카가 남아메리카에 비해서 어떻게 월등하게 발전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과 식민지화는 경제사학자들에게는 역사상 가장 큰 자연실험이었다. 즉, 두 서양문화(영국과 스페인ㆍ포르투갈)를 선택해 낯선 땅에 주입한 다음 어떤 문화가 더 훌륭한 결과를 낳는지 관찰하는 실험이다.

스페인이 정복한 남아메리카 식민지에서는 모든 토지가 왕의 소유였지만, 영국이 점령한 북아메리카에서는 최하층민에게도 토지를 소유할 기회가 주어졌다. 영국 철학자 로크(John Locke)의 재산권 사상은 바로 북아메리카의 제도를 결정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북쪽에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100년 안에 토지 소유자들의 재산권에 기초해서 민주적 제도를 정착시키고 가장 부유한 국가로 발전하였으나, 남쪽의 혁명은 200년 동안 대륙 전체를 분열과 불안정, 저개발의 구렁텅이에 빠뜨렸다. 남아메리카의 조지 워싱턴인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는 결국 남아메리카합중국을 세우는 데는 실패했다. 다수에게 분배된 재산권과 민주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영국식 모델이 소수에게 부와 권력을 집중한 스페인식 모델보다 경제발전에는 더 효율적이었다는 사실이 경제사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투쟁의 인생, 예술혼으로 승화하다

150여 점에 이르는 프리다 칼로의 전작(全作)은 투쟁의 연속이었던 그녀의 인생을 보여준다. 대중적인 멕시코의 전통 회화 양식으로 그린 그녀의 그림들은 유럽 고전 회화와 아방가르드 미술부터 대중적이고 민속적인 멕시코 미술까지, 또 로마 가톨릭, 아스텍 문명, 유럽 철학부터 칼로와 리베라가 지지했던 공산주의까지 모두 아우르고 있다.

아이도 유산하고 평생 자녀를 갖지 못한 프리다. 여자로서의 행복도 누리지 못한 프리다. 그녀에겐 그림만이 그녀를 위로하는 친구였다. 그러나 그녀는 불꽃 같은 삶 속에서 자신의 작품으로 그녀만의 아이를 낳은 것은 아닐까? 그녀의 삶에 대한, 사랑에 대한, 그림에 대한 열정은 그녀를 불멸의 화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프리다의 유언과도 같은 구절은 마치 나병(癩病)을 안고 평생을 살았던 시인 천상병의 마지막 독백을 연상시킨다. “나의 마지막 외출이 즐겁기를/ 그래서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멕시코시티 서남쪽에 위치한 코요아칸. 우리는 이곳에서 역사적인 인물 두 명, 트로츠키와 칼로를 만날 수 있다. 트로츠키의 집은 ‘트로츠키 기념관’으로, 그곳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프리다 칼로의 집 역시 ‘프리다 칼로 기념관’으로 코요아칸의 명소가 되었다.

최병서 동덕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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