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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정치가 경제를 인질로 잡았다

입력
2019.06.06 04:40
수정
2019.06.06 13:35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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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패러디한 복장을 한 시민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아기로 표현한 풍선 앞에서 그의 영국 국빈 방문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런던=로이터 연합뉴스
4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패러디한 복장을 한 시민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아기로 표현한 풍선 앞에서 그의 영국 국빈 방문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런던=로이터 연합뉴스

지난 300년 간의 금융위기 역사를 분석한 연구서 ‘이번엔 다르다’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국제금융ㆍ거시경제 전문가 카르멘 라인하트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최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미중 무역분쟁의 향후 전개 상황에 대해 비관적 전망을 내놨다. ”충돌 초기에는 양국이 적당한 수준에서 합의를 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지금은 협상 대상이 국가 안보나 기술과 같은 영역으로 번진 터라 더 이상 해결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으로의 불법 이민 방지 요구와 연계해 멕시코에 관세 부과를 예고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최근 조치를 언급하면서 ”연일 계속되는 ‘새로운 충격’ 때문에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전례 없이 커졌다"는 우려도 내놨다.

라인하트 교수의 현안 분석에 아주 새로운 해석이 들어있는 건 아니지만, 그의 진단은 작금의 글로벌 경제 불안이 지닌 이례적 성격을 새삼 부각시킨다. 세계 도처에서 진행 중인 실물경기와 금융시장의 동요가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닌 정치경제적 문제라는 점, 더구나 정치가 우위에 서서 경제를 흔드는 형국이라는 점이다. 미중 무역분쟁은 말할 것도 없고 라인하트 교수가 ‘새로운 충격’으로 명명한 일련의 사건 또한 경제 아닌 정치가 격발시키고 있다는 점은 자명해보인다.

기신기신한 유럽 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운 유럽의회 선거부터가 그렇다. 유럽의회를 장악해온 중도파의 퇴조와 비주류 포퓰리즘 정치세력의 약진으로 요약되는 선거 결과가 시사하는 바는 유럽 시장에서 유럽연합(EU)이 발휘해온 역할이 축소되면서 자국 우선주의가 강화되리라는 사실이다. EU 경제의 주춧돌이라 할 수 있는 상품, 서비스, 자본,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이 고용 부진과 소득 양극화 요인으로 지목되고, 기층 국민의 이러한 불만이 반(反)이민-반 EU-반 세계화를 기치로 앞세운 신진 세력의 발흥으로 이어진 까닭이다. 이러한 정치적 지형 변화가 유럽 전반에 보호무역주의를 부추긴다면, 이미 트럼프 행정부 출범을 계기로 노골화된 미국의 보호주의 정책과 맞물려 세계 경제를 심각하게 가라앉힐 것이란 우려가 제기될 수밖에 없는 양상이다.

정치가 경제를 흔드는 상황은 신흥국도 다를 바 없다. 신흥국발 경제위기의 진원이 될 거란 우려까지 낳고 있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부터가 그렇다. 우파 성향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올해 초 집권한 브라질 경제는 1분기부터 마이너스 성장(-0.2%)을 하며 흔들리고 있는데, 새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연금 개혁과 교육예산 삭감이 격렬한 반대에 부딪치고 대통령의 분열주의적 행태가 수습은커녕 분란만 더욱 키우고 있는 탓이다. 브라질과 더불어 남미 경제 ‘빅2’로 꼽히는 아르헨티나 또한 지난해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으며 약속한 긴축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대립이 심화하고 있다. 지난달 말 현지 최대 노동조합의 전국 총파업으로 갈등이 극에 달했지만, 10월 대선을 앞둔 정치 일정 탓에 수습책 마련이 요원하다.

모하메드 엘 엘리언 알리안츠 수석경제자문은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에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1992년 대선 구호였던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를 언급하며 현 상황의 특이성을 짚었다. 클린턴의 백악관 입성에 있어 수훈갑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이 구호가 (최소한 선진국에서는) 경제가 정치에 막강한 영향을 발휘한다는 시장의 인식을 고스란히 보여줬다면, 지금은 정치가 갈수록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관계가 역전됐다는 것이다.

시장에 있어 ‘가격’과 같은 자동조절 장치가 부재한 정치가 경제를 자기실현의 무기로 동원하면서 지금의 세계적 경기 불안이 단기간에 해소될 것이란 기대도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한국, 미국 등 주요국에서 장기 시장금리를 대변하는 국채 10년물 금리가 단기채 금리, 심지어는 기준금리까지 밑도는 금리 역전 현상이 만연한 것은 시장의 깊은 회의감을 방증하는 인상적 사례다. 경제를 볼모로 잡은 정치의 ‘인질극’이 길어질수록 한국처럼 해외 경제 의존도가 높은 국가에 더 큰 피해가 닥칠 거라는 사실은 불문가지다.

이훈성 경제부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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