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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취재원 보호’ 내던진 기자 출신 의원

입력
2019.06.03 19:00
수정
2019.06.03 21:56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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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지난달 29일 국회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의원 총회 도중 강효상 의원이 한미 정상 통화내용 기밀 유출 논란과 관련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9일 국회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의원 총회 도중 강효상 의원이 한미 정상 통화내용 기밀 유출 논란과 관련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야, 기자는 특종을 위해서라면 영혼이라도 파는 사람들이야.”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그러니까 풋내기 기자 시절 한 선배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당시 소속 부서의 팀장급 선배였는데, ‘특종 좀 물어오라’는 압박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자들(특히 다른 언론사의 기자들)과 말을 섞을 땐 조심하라’는 충고에 가까웠다. 내가 무심코 건넨 한마디가 다른 기자의 취재에 어떻게 활용될지 모르고, 인간관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지며, 그 결과 때로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는 일이 언제든 닥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요컨대 기자는 특종 앞에선 눈이 멀게 되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최근 ‘외교 기밀 유출 논란’ 사태를 촉발한 강효상 자유한국당 의원을 보며 ‘특종에 눈 먼 기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사건의 숱한 쟁점들을 따져볼 생각은 없다. 이미 관련 보도를 통해 수없이 다뤄졌고, 정식 고발도 이뤄진 터라 향후 검찰과 법원에서 시시비비가 가려질 것이다. 대신 여기서 짚고 싶은 건 강 의원이 ‘정보 입수자’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관계, K씨 측 공식 입장 등을 토대로 기밀 유출 과정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지난달 7일 밤 10시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35분간 전화통화를 했다. 8일 심야, 정확히는 9일 0시30분(미국시간 8일 오전 11시30분)쯤 강 의원은 고교 후배인 주미 대사관 소속 참사관 K씨에게 카카오톡의 보이스톡으로 연락을 취했다. “청와대가 공개한 한미 정상 통화내용이 사실인가”라는 강 의원 질문에 K씨는 “맞다”고 답했다. 이어 강 의원은 트럼프 대통령의 ‘5월 방한설’을 물었고, “성사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는 답변을 듣자 ‘그럴 리 없다’면서 “판단 근거가 무엇이냐”고 캐물었다. 특히 ‘분위기 파악을 위해 나만 참고하겠다’며 계속해서 관련 정보 제공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K씨는 ‘실수로’ 한미 정상 통화 요약본에서 확인한 일부 표현을 그대로 말해 줬다.

아마도 강 의원은 ‘뜻밖의 월척을 낚았다’며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그가 정상들 간 구체적인 대화 내용은 ‘입수 자체가 극히 어려운 최고급 정보’라는 걸 모를 리는 없다. 접근 권한이 매우 제한된 정보를 낱낱이 공개할 경우, 제공자 신원 노출의 위험이 그만큼 커진다는 건 상식이다. 그런데도 강 의원은 날이 밝자마자 9일 오후 1시쯤 기자회견을 열어 인용부호까지 써 가면서 한미 정상의 ‘비공개’ 발언을 너무나 생생하게 풀어 냈다. ‘미국 정부 소식통과 국내외 외교 소식통’을 소스로 내세웠지만, 이 역시 알 만한 사람들에겐 주미대사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될 법한 발언이다. 결국 정부 합동 감찰에서 K씨의 외교 기밀 누설 행위는 들통이 났고, 지난달 30일 파면 결정이 내려진 그는 이제 형사처벌 위기까지 처해 있다.

“친한 고교후배가 고초를 겪어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던 ‘전직 기자’ 강 의원의 행태에서 읽히는 건 ‘직업윤리의 실종’이다. 기자가 최우선시해야 하는 원칙은 ‘취재원 보호’라고 배웠다. 그렇다면 기자로서 ‘영혼을 파는’ 가장 악질적인 형태도 취재원 보호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일일 것이다. 정부 견제를 위해 각종 공익제보를 받거나 정보를 취득하는 국회의원도 이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K씨와의 통화 이후 기자회견을 하기까지, 강 의원 머릿속에 ‘K씨 보호’라는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나만 참고하겠다”던 정보를 K씨의 동의나 설득을 구하려는 노력도 없이 불과 12시간 만에 공개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해당 정보는 국가기밀이었다. K씨 행위의 위법성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강 의원으로선 K씨 보호에 더욱 신경을 썼어야 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오로지 ‘한건주의’ 욕심에 타인의 안위와 관련해선 나몰라라 했다. 이런 그를 옹호하는 세력의 ‘국민과 나라를 지키겠다’는 약속에 믿음이 가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김정우 국제부 차장 woo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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