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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에밀리 데이비슨의 진실(6.4)

입력
2019.06.04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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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제트 운동의 비극적 절정에 1913년 에밀리 데이비슨의 엡섬더비 참사가 있었다. 참사의 진상은 100년 뒤 밝혀졌다. 그의 장례 행렬 모습이다. media.iwm.org.uk
서프라제트 운동의 비극적 절정에 1913년 에밀리 데이비슨의 엡섬더비 참사가 있었다. 참사의 진상은 100년 뒤 밝혀졌다. 그의 장례 행렬 모습이다. media.iwm.org.uk

한 세기 전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 ‘서프라제트(Suffragette)’들의 활동은 21세기 여성운동보다 훨씬 과격하고 초법적이었다. 그들은 관공서 창문에 돌을 던지고, 우체통에 불을 지르고, 고위 공직자의 집 신축 공사장을 폭파하고, 심지어 심야의 웨스트민스터 궁에 잠입하기도 했다. 젠더 권력의 무시와 조롱이 반복되면서 저항의 양상은 점점 더 격렬해졌고, 그 비극적 절정에 1913년 6월 4일 에밀리 데이비슨(Emily Davison, 1872~1913)의 엡섬 더비(Epsom Derby) 참사가 있었다. 만 40세의 데이비슨은 그날 경마장 곡선 주로로 접어든 국왕 조지 5세의 경주마 ‘앤머(Anmer)’에게 달려들다 말과 충돌했고, 나흘 뒤 숨졌다. 당시 그는 에멀린 팽크허스트(1858~1928)의 서프라제트 단체 ‘여성사회정치연합(WSPU)’의 깃발 두 장을 품고 있었다.

옥스퍼드 세인트 휴스 칼리지를 졸업하고 교사와 가정교사로 일하던 데이비슨은 1906년 WSPU에 가담했다. 숨지기 전까지 만 6년 동안 그는 10여차례 체포됐고, 7차례 옥중 단식투쟁을 벌여 간수들이 고무튜브로 강제 급식을 시행한 것만 47번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1909년에는 당시 재무장관이던 훗날의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의 마차에 돌을 던져 한 달간 교도소에서 강제노역을 했고, 출옥 후 간수들의 가혹행위에 대해 소송을 걸어 40실링의 보상금을 받아낸 일도 있었다.

엡섬 더비 참사를 두고, 용감한 순교라는 입장과 무모한 무정부주의적 일탈이라는 입장이 엇갈렸다. 물론 진영 내에선 전자가 압도적 다수였다. 다만 그가 귀가 열차표를 지니고 있었고, 며칠 뒤 동생과 약속이 있었던 점을 들어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리라는 추측이 있었고, 관중 무리에 시선이 가려져 달려오는 말을 못 본 탓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2013년 몇몇 영상 전문가들이 더비 영상을 디지털화해 정밀 영상 감식을 벌인 결과, 데이비슨은 경주마들의 동선을 잘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며, 자살을 시도한 게 아니라 조지 5세 경주마의 고삐를 붙들려고 한 것으로 결론 지었다. 그는 국왕의 말이 WSPU의 깃발을 매달고 달리게 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날 사고로 말에서 추락해 뇌진탕을 앓았던 기수 허버트 존스도 그 일 이후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51년 부엌에서 가스로 자살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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